해산(海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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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명 : 해산(海山)스님

표충사 뒤편 재약산 정상 수미봉 아래 진불암(眞佛庵)이 암자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해산스님의 전설 같은 수행담이 전해오는 내원암, 단청장 혜각스님과 불모 석정스님이 6년 묵언정진했던 한계암, 독립운동 산실 서상암이다. 청하암 적조암도 만난다.
계단을 내려서자 단단한 자갈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 두채가 보인다. 진불암이다. 도봉산 무문관을 보는 듯 하다. 거친 자연환경을 감안해서 이처럼 튼튼하게 지은 듯 하다. 법당과 요사채 두 동이 나란히 서 있고 그 가운데 샘이 솟아났다. 샘터 앞에 작은 돌 비석이 하나 서있다. 해산스님 오도송이 적혀 있다.
진불암에는 과거부터 납자들이 토굴에서 한철씩 생식을 하며 도를 닦은 유서 깊은 수행처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해산스님이다. 스님의 수행과 일화는 산 중 곳곳에 남아 전한다. 스님은 진불암에서 정진할 때 하루 쌀 한 숟가락을 물에 불려서 먹고 일주일 동안 변도 보지 않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해산스님의 속명(俗名)은 정경출(庚出), 법명은 수진(守眞), 당호(堂號)가 해산(海山)이다. 1910년 청도에서 태어난 스님은 유학과 한문을 배우고 밀양으로 이사한 뒤 표충사로 차를 배달하는 일을 하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어 1926년 17세에 내원암을 처음 보고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청도 운문사 사리암으로 입산했다가 내원암에서 박담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산스님은 1934년 늦가을 가행정진을 결심하여 동상암(東上庵), 진불암(眞佛庵)에 올라한 철을 났다. 동상암 옆 표충사가 내려 보이는 벼랑 끝에 앉아 죽을 각오를 하며 밤낮으로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짜기 전체가 훤하게 밝고 한겨울에 솥에 곰팡이가 피는 경험을 했다. 바로 걸망을 메고 표충사로 내려가 객실에 머무는데 대중이 “해산이 견성한 것 같다”며 웅성거리더니 저녁 예불 뒤 법상으로 모셔 상당법문을 청했다.


     제망라포무비수(帝網羅捕無鼻獸),
     능장활각유제아(能將蛞角誘啼兒),
     금모사자반거지(金毛獅子半踞地),
     기고만장범난등(氣高萬丈凡難登)

     하늘 덮는 그물을 쳐서 코 없는 짐승을 잡고,
     능히 달팽이 뿔로 우는 아이를 달래는데,
     금털 사자가 웅크리고 앉았으니,
     기세가 당당하여 모두가 오르기 어렵도다.”


그 때 나이 25세였다. 진불암 ‘해산바위’에는 이 오도송을 한글로 풀어 적어 놓았다.
이후 해산스님은 정혜사를 찾아가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치열한 법거량 끝에 인가를 받았으며 만공스님은 ‘해산본래겁무연(海山本來劫外然)’, 바다와 산(해산)은 본래 겁 밖이로구나는 구절이 담긴 전법게를 전했다. 해산스님은 운수납자가 되어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오대산 속리산 등지로 행각을 하고 마하연에서 3년 결사를 하였으며 송광사에서는 강사를 했다. 1948년 만 38세에 통도사에서 조실로 추대돼 6년간 조실을 맡았다. 1954년부터 12년 간 부산 아미동 광성사에서 만행의 시간을 갖다가 1966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수월선원(水月禪院)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1967년 윤월하스님 의 추천에 의해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표충사로 돌아온다. 7년간 표충사에서 주지와 조실을 맡다 1974년 축발 암자 내원암으로 돌아와 해동제일선원(海東第一禪院)[1]이라는 이름으로 선원을 개원했다.
내원암에서 6년을 정진하며 후학을 기르고 부산 밀양 등 재가자들에게 깊은 감명과 함께 수많은 가르침을 전했던 스님은 1980년 12월 22일(음력) 부산 광성사(光成寺)에서 세수 71세, 법랍 55세로 입적(入寂)했다. 진불암에서 직선으로 내려서면 내원암이다. 내원암 입구에 해산스님 부도와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비가 서있다.

[출처] : 불교신문 [가람과 뫼] ⑱ 재약산 표충사와 암자들

  1. 선원총람에는 ‘동방제일선원’으로 나옴(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