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순호(靑潭淳浩)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 법호·법명 : 청담순호(靑潭淳浩 : 1902~1971) - 제2대 종정
  • 생애·업적

불교정화 운동의 기수이자 맹장인 청담 스님은 1902년 10월 20일 경남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268번지에서 이차근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찬호(讚浩)이며 법명은 순호, 법호는 청담이다.
1919년 18세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1주일 동안 헌병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1922년 진주 호국사에서 박포명(朴抱明) 스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했으며 1923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중퇴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 적송촌 송운사에서 약 6개월 동안 행자 수업을 받았다.
1926년, 25세 때 경남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서 남규영(南圭榮)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그 해 10월 26일, 개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 스님께 내전(內典)을 공부했다. 1928년 3월 14일~17일에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는데 앞장섰다. 1929년 양주 봉선사에서 영호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1930년 개운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강원 졸업 후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참선 수행에 몰두하는 등 20여 년간 전국 제방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1933년, 32세 때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스님은 만공스님 회상에서 공부할 당시 무자 화두를 들었으며 화두를 참구한지 1, 2년이 지나면서 점차 법기가 익을 대로 익어 삼매의 경지에 들었다. 침식을 잊은 채 1주일 동안 정진해도 얼굴은 맑고 깨끗했다. 마음속에 서려 있던 의심의 안개가 말끔히 걷혔기 때문이다. 이때 만공 스님은 청담 스님을 불러 법거량을 해 본 뒤 오도를 인가해 주면서 올연(兀然)이라는 법호와 게송을 내렸다.

올연 선자에게 보이다.

전하는 것도 30방이요
받는 것도 30방이니
또한 30방의 방을
올연 선자에게 붙여 주노라.

示兀然禪子 (시올연선자)
傳也三十榜 (전야삼십방)
受也三十榜 (수야삼십방)
棒也三十榜 (봉야삼십방)
付與兀然子 (부여올연자)


한편 당시에 스님의 오도송을 듣고 싶다고 간청하는 도반에게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들려주었다.

부처님과 조사님네 그다지도 어리석었던가
어찌 그윽한 이쪽 소식 알았다 하랴
만일 누가 내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 물어 온다면
길가의 옛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대답하겠네.

上來佛祖錢癡漢 (상래불조전치한)
汝得了知玆邊事 (여득료지자변사)
若人問我何所能 (약인문아하소능)
路傍古塔傾西方 (노방고탑경서방)


이후 1935년 설악산 봉정암에서 동산, 효봉 스님과 함께 하안거에 들었으며 1947년에는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자운·운봉·혜암·법전 스님 등과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단행하여 치열하게 정진했다.
1954년, 53세 때 비구측 수뇌로서 불교정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54년에는 조계사에서 250여 명과 단식에 돌입 “한국불교가 정화될 때까지 단식할 것이나, 몸을 지탱하지 못 하면 순교의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1957년 해인사 주지, 1961년에는 도선사 주지에 취임하여 사찰을 운영하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1966년 11월 30일 조계종 통합종단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1967년 대한민국 종교인협의회 의장단에 피선되었다. 한편 1967년에 해인총림이 발족하자 스님은 방장 성철 스님과 함께 1969년 하안거까지 총림선원의 서당(西堂) 소임을 맡아 정진하였다.
1970년 월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사직하자 스님은 후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으로 피선 되어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1년 11월 15일 조계사 총무원장실에서 입적에 드니. 세수 70세, 법랍 45년이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30~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