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곡(麟谷)스님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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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곡(麟谷)스님

1895년 2월15일(음력)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박요숙(朴堯淑) 선생과 송씨(宋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 창수(昌洙)는 법명으로도 사용했다. 법호 인곡(麟谷)은 인곡(仁谷)으로 쓰기도 했다. 14세에 고성 문수사에서 금성(錦城)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세에 장성 백양사 강원을 마치고, 율사(律師) 금해(錦海)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대서원을 세우고 팔공산 금당(金堂) 탑전(塔前)에서 100일간 용맹정진했다. 이 때 가사를 받아 입는 서몽(瑞夢)을 꾸고 납자의 본분을 지키며 살겠다는 발원을 했다. 이후 만행에 나서 각지의 사찰을 주유하던 인곡스님은 예산 보덕선원 보월(寶月)스님 회상에서 여러철 안거를 마쳤다. 보월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이며, 금오(金烏)의 은사로 명성이 높았다. 보월스님 회상에 머물 당시 “단정 행직(行直)하고, 예의(銳意, 열심히 잘 하려고 단단히 차린 마음) 정진하여, 대중 가운데 선기(禪機)가 제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또한 금강산 마하연 만공스님과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스님 문하에서 깊이 공부했으며, 수월(水月).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을 친견하며 정진했다. 용성스님에게 법을 인가받고 인곡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0여 년간 제방사찰에서 정진한 인곡스님은 30세에 백양사로 돌아왔다.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된 스님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여 선열(禪悅)을 맛보라”며 납자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1945년 해방 후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긴 인곡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에서 1000일 기도를 올렸다. 1953년에는 통도사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노년에 해인사에 주석하던 스님은 미질(微疾, 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1961년 하안거 해제일인 7월15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67세, 법납 52세. 제자로는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慧菴)스님을 비롯해 수진(守眞).법행(法行).운문(雲門).강혜(剛慧).법경(法鏡).포공(飽空).대일(大日).봉주(奉珠).봉우(鳳愚).법종(法宗).운성(雲性).동진(東眞)스님이 있다.

출처: [불교신문(2009.06.16 23:03)] 59. 인곡창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