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정의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은 월정사의 산내 암자인 남대 지장암에서 경영하는 선원이다.
연혁
남대 지장암은 한암스님이 1925년 49세에 봉은사 조실로 추대 받고 잠깐 머물다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온 후 입적까지 27년간 산문을 나오지 않았던 곳이다. 1931년경 금강산에서 한암 스님께 공부지도를 받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두 분의 비구니 스님(황해도 출신 율노스님, 개성 출신 해노스님) 등이 지장암에 주석하게 되면서 지장암에서 해제 결제없이 30여명의 스님들이 정진했으며, 1937년 본공스님이 한암스님을 친견하고 지장암에서 입승을 살며 선원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이로부터 지장암 기린선원이 탄생하였다.
지장암 비구니선원은 최초 비구니선원을 연 수덕사 견성암(충남 예산}에 이어 윤필암(경북 문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1931년경 지장암 기린선원의 설립으로 우리나라 북방 비구니 선불교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지장암은 한 철에 비구니선객들이 가져오는 쌀 6말과 보살이 가져오는 쌀 9말로 정진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인홍스님이 원주를 맞으면서 스님의 신심과 원력으로 곡식을 다락에 쌓아 놓을 수 있었고 대중은 먹는 일에 걱정을 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진, 인성, 혜종스님이 지장암을 중창복원하고 한국전쟁이후 처음으로 1975년 정식방무를 받아 하안거에 인법당을 개원하여 현묵스님(석남사 출가)을 비롯하여 전국 비구니 선승 40여명이 정진을 하게 되었다.
1992년까지 매년 하안거에 선원대중이 모여 정진을 하였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시설의 협소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성진스님 상좌 혜종스님은 1993년부터 선원중창불사를 시작하는 관계로 방부를 받지 못하고 3년에 걸쳐 법당 우측에 지층을 겸한 90평 규모의 선방을 신축했다. 이리하여 선원으로의 제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5년 음력 8월9일 혜종스님의 입적으로 상좌 정안스님이 후임 감원을 맡아 1년 소임을 살았으며, 은사 혜종스님의 갑작스런 열반으로 무상을 느낀 정안스님은 3년을 기한하고 참선공부를 떠났다. 이어서 대전 법륜사 길상스님이 감원을 살면서 선원의 큰방과 다락에 벽장을 만들었으며 선원 현판을 조각하여 걸고, 새로 지은 건물에서 1997년 처음으로 하안거를 열었으며, 이어서 98, 99년 하안거를 지냈다.
참선공부를 마무리 하고 돌아온 정안스님은 제방의 바램과 본사 현해주지스님이 오대산 성지에서 비구니 선원이 하안거만 개설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심을 헤아려 본사 주지 스님의 원력과 정안스님의 신심으로 1999년 10월 14일 동안거를 개원하여 열악한 조건이지만 동안거[1], 하안거[2]를 겸비한 선원으로서의 진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출처: '선원연혁', 남대 지장암, http://www.xn--q20bm8bgy1a0fc8wd.kr/theme/page/html/company/08.php )
주석
위치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남대 기린산 기슭에 있다.
- 주소: 강원도 진부면 동산리 63-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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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문맥항목 | 기관/장소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남대_지장암_기린선원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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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소속이다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평창 월정사 | ~의 소속이다 |
한암(漢巖)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의 기원이다 |
성진 (性眞)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
혜종(慧宗)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