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담성우(黙潭聲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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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묵담성우(黙潭聲祐, 1896~1981) (한국불교태고종)
  • 생애·업적

담양 용화사를 상주도량과 교화도량의 근본장소로 삼고 창건한 묵담 대종사는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1914년 내장사 금강계단에서 금해 율사에게 비구 구족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백양사 불교 전문강원에서 사미과·사교과를 졸업했으며, 정읍 내장사, 곡성 관음사, 부안 내소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 1918년 백양사 법계고시에서 대선법계를, 1931년 종사법계를, 1932년 대종사법계를 수하고 백양사 청류암 관음선원, 양주 망월사, 담양 우송선원 등 70여 안거를 성만(盛滿)했다.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오도송(悟道頌)이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靑天霹靂鳴 天地波濤起 我卽常安閑 聊與山花笑).”였다.
이로서 묵담 큰스님은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유의 마음을 얻었다.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여여부동은 금강경의 언어다.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 여여부동이다.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상에 걸림이 있으리요.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태고종단 장(葬)으로 용화사에서 다비, 9과의 사리가 나와 용화사를 비롯 장성 백양사와 전주 관음선원, 부산 금수사, 안양 연화사, 제주 성광사, 선광사, 금붕사, 성림사에 각각 한 개씩을 나눠 봉안하고 있다.
저서로는 ‘묵담대종사문집’과 ‘집착하지 말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현대고승법어집)’ 등이 있다.
일찍이 11세에 동진 출가하시어 선교율(禪敎律)에 능통하셨던 묵담 큰스님,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에 우뚝하신 스님은 팔십 평생 동안 제자를 기르고, 부처님 법을 전하며, 가람을 중수하고, 보시행으로 일관했다.
그 수행력과 덕망에 힘입어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내셨는데, 청정율사가 대처승단이라 할 수 있는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이력이 이채롭다.
“승단의 기본은 화합에 있다”, “행하기 힘든 것을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 출가 승려의 정신”이라며 대중 불교 구현에 전력하신 스님은 불교 정화 때 처음에는 조계종단을 지지했다가 종조(宗祖) 문제로 만암 스님처럼 환부역조(換父易祖)할 수 없다는 생각과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생각이 확고해 태고종단에 남으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 출처 : 담양인신문(2016.10.10 13:18:28) 우리고장 名僧을 찾아서/③묵담 대종사(默潭 大宗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