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경욱(高峰景昱)
- 법호·법명 : 고봉경욱(高峰景昱, 1901-1967)
- 생애·업적
본관은 진주(晉州). 속명은 강욱재(姜旭在), 고봉은 법명이다. 황해도 장연 출생. 아버지는 영곤(永坤)이며, 어려서부터 선유숙(仙遊塾)에서 한학을 배웠고, 13세에 다섯 살 연상의 부인과 혼인하였으나 17세 때 부인이 죽었다.
그 뒤 방랑길에 올랐다가 개성에 정착하여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나 인생의 근본문제를 풀고자 25세에 금초(錦草)를 따라 서울대각사(大覺寺)로 가서 백용성(白龍城)의 제자가 되었다.
도봉산 망월사(望月寺)에서 스승과 함께 만일결사도량(萬日結社道場)을 열어 정진하였고, 다시 양산내원사(內院寺)로 옮겨 4년을 정진하였다. 1930년부터는 금강산유점사(楡岾寺)·마하연(摩訶衍), 함경도 석왕사(釋王寺) 등 유명한 선원들을 찾아 한 철씩 수도하였다.
특히 석왕사 선원에서는 ‘이 뭣고[是甚?]’ 화두를 들고 일념으로 정진하다가 도를 깨닫고 “산 아래 다리를 펴고 누워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한 곡조로 태평가를 부른다.”는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그 뒤 해인사(海印寺)로 가서 대장경을 열람하고 통도사(通度寺) 전문강원에서 공부하였다. 1943년 해인사 강사로 취임하였고, 은해사(銀海寺) 강사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일념으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 후 만공(滿空)과 더불어 법거래(法去來)를 하기도 하였고, 술과 여자까지도 물리치지 않는 이행(異行)을 즐겨 하였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도 술에 취하는 법이 없었고 여자를 택하면서도 여자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형식을 초월해서 살았다.
그 뒤 해인사에서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김천청암사(靑巖寺)로 옮겨 불경을 가르쳤다. 주위에서는 그를 ‘주고봉(酒高峰)’이라 불렀으나, 언제나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경을 연구하고 선정에 들었으며, 학인들을 가르칠 때는 그 엄격함이 대단하였다. 1967년 『화엄경』을 보면서 앉아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우룡(雨龍)·고산(杲山) 등이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