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익부(忠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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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위하여 설치하였던 종2품의 관청.

개설

충익부는 조선시대 원종공신을 위하여 설치한 종2품의 관청이다. 건국 초에 창설한 충익사(忠翊司)를 1466년(세조 12) 충익부로 승격시켰다. 충익부에는 종5품 도사(都事) 2명을 두어 실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뒤에 충훈부(忠勳府)와 합쳤다가 광해군 때 잠시 독립하였고, 이어 병조에 붙이고 충훈부에 합하기를 거듭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충익부는 원종공신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원종공신은 조선시대에 큰 공을 세운 정공신(正功臣)을 정할 때,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 칭호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을 정할 때, 태조의 잠저(潛邸)에서 시종(侍從)의 공이 있던 문무양반·잡리(雜吏)·천례(賤隷) 등 1,000여 명에 대하여 원종공신의 칭호를 수여한 것이 처음이다. 원종공신 1등은 양반, 2·3등은 잡인(雜人)으로 구분하였으며, 태종 때에도 많은 원종공신이 탄생하였다. 즉, 충익부는 이들 원종공신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설립한 관청으로 볼 수 있다. 1678년(숙종 4)에는 충익부를 병조에 소속시켰으며 1616년(광해군 8) 이후부터는 충훈부에 소속시켰다.

조직 및 역할

충익부에는 도사 2명을 두어 실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매년 한 번 충익부에서 잔치를 베푼다고 명시되어 있다. 충익부는 예우 기관으로 그 이름만 존재할 뿐 실질적인 역할은 거의 하지 못하였다. 1555년(명종 10) 6월에는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삭감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때 충익부는 원종공신을 위한 것일 뿐 별로 맡아보는 일이 없으니 우선 임시로 줄여서 충훈부에 소속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다.

광해군 때에는 원종공신 본인의 성명·나이·본관·거주지를 써 넣은 장부를 만들어 충익위(忠翊衛)라 칭하였다. 그리고 원종공신 수에 따라 번(番)을 나누어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고 서로 번갈아 돌아가며 입직하게 하여 금군(禁軍)으로 삼게 했다(『광해군일기』 8년 4월 17일).

변천

원종공신의 아문을 1456년에 충익사로 부르게 되었고, 1466년에는 충익부로 승격시켜 종2품 아문이 되었다. 이때 세조가 전답과 노비를 더 하사했으며, 옛 청사가 좁고 누추하다 해서 종부시(宗簿寺)의 청사 하나를 주고 그 터에 새로 중건하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도사 둘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1506년(연산군 12) 충익부의 도사를 혁파하고 충익사라 격하하여 무록관(無祿官) 2인을 두었다가 충훈부에 병합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잠시 독립 관청이 되었다가 곧 병조에 소속시켰다. 인조 때에는 충훈부에 합쳤다가, 1676년(숙종 2) 병조에 소속시켰다. 1680년(숙종 6)에 충훈부에 합치고, 1689년(숙종 15)에 다시 병조에 소속시키는 등 여러 번의 변화가 있었다.

1689년 3월 13일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병조 판서윤심은 그동안 충익부의 변천사를 언급하였다. 즉, 충익부는 처음에 병조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충훈부로 환속(還屬)하였지만, 군국(軍國)의 수요를 돕는 것도 아니고 훈부(勳府)의 사사로운 비용만을 사용하니 충훈부에 있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은 다시 병조에 소속시켰다. 이처럼 충익부가 병조에서, 충훈부, 다시 병조로 귀속되는 정황이 언급되어 있다.

1701년(숙종 17)의 『숙종실록』 기사를 보면, 충훈부의 요청에 의해 충익부가 다시 충훈부에 소속되는 정황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천이 반영되어 정조 때 편찬한 법전 『대전통편』에서는 충훈부에 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상은 정약용이 쓴 『경세유표』「하관병조(夏官兵曹)」 기록이나 『연려실기술』 별집 제6권 「관직전고(官職典故)」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충익부의 소속이 변경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충익부의 역할이 미미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신을 위한 예우 기관이었던 만큼 각 관청이 필요에 따라 충훈부를 예속시켜, 자신들의 위상 강화를 꾀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