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군(三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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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중앙군을 중·좌·우군으로 편성한 상설 군사기구.

개설

원래 삼군(三軍)이란 용어는 『주례』에서 “12,500명을 군(軍)이라 하는데, 왕은 6군(軍), 대국은 3군(軍), 차국(次國)은 2군(軍), 소국은 1군(軍)을 가진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대국이 소유한 군대의 규모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후 삼군은 뜻이 약간 변하여 군대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논어』의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匹夫)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군은 일반적인 군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삼군은 일반적인 군대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삼군은 중앙군을 중·좌·우군으로 편성한 상설적인 군사기구를 뜻하는 용어였다. 고려의 중앙군은 평시에는 2군 6위제로 운영되었지만 전시에는 전·후·중·좌·우 5군(軍)을 편성하여 출동하였다. 그런데 1391년(고려 공양왕 3) 고려의 전통적인 중·전·후·좌·우의 5군 제도에서 전·후 2군을 없애고, 중·좌·우의 3군으로 중앙군을 재편하면서 동시에 이를 통할하는 사령부로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 임명되어 조선왕조 개창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5군의 편성은 5진(陣)의 진법과 관련을 갖는 데 비해 3군은 진법과는 무관한 군사기관이었다. 이에 지휘계통을 의미하는 3군과 진법에서의 5진의 관계가 불분명하므로 세종 때 진법에 대한 재검토가 시행되어 5위 체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내용 및 변천

고려말의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는 조선 건국 이후 1393년(태조 2) 9월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확대·개편되었다. 의흥삼군부는 흔히 삼군부(三軍府)로 줄여서 부르는데,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좌·우위와 고려시대 이래의 2군 6위의 8위를 합한 10위를 통솔하였다. 설치 당시 삼군부는 10위를 중·좌·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대신들을 절제사(節制使)로 임명하여 이를 통솔하게 하였다. 또, 중앙군 이외에도 각 도의 상번 군사로 편제된 시위패(侍衛牌)를 속하게 하였다. 삼군부가 군사 최고기관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개국에 공로가 있던 정도전(鄭道傳)이 판사에 임명되어 단일 책임자에 의한 관서(官署)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삼군부에 소속된 군사력은 거의 없었다. 사병(私兵)이 혁파되기 전까지 삼군은 사실상 각 절제사에 영속(領屬)되어 있었다. 따라서 삼군부는 군령·군정기관이라고는 하나 중앙군을 이루는 무반 군사들을 통할하는 데 불과하였다. 삼군부는 광화문의 남쪽에 있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동쪽 맞은편에 청사를 마련해 정부(政府)와 군부(軍府)가 일체이면서도 서로 대립된다는 외형을 갖추어 확장했다.

1398년(태조 7)부터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1400년(정종 2) 절제사 등의 사적 영속관계에 있던 사병이 혁파되었고 이에 강력한 집권화 정책의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즉 그해 4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중추원을 완전히 삼군부로 개칭하였다. 이는 삼군부와 중추원이 병치되어 있는 데서 일어나는 군령·군정상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최고지휘관인 판삼군부사·지삼군부사 등의 관원을 총제(摠制)라고도 하였다. 중추원의 기능이 삼군부로 통합됨에 따라 왕명 출납의 기능은 승정원으로 옮겨갔다. 또한, 삼군부의 요원은 의정부의 구성원이 될 수 없게 하여 정부와 군부가 서로 견제, 대립하는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7월 삼군부는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어 군기와 왕명 출납을 장악하였던 중추원 기능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이후 삼군부의 명칭은 다시 쓰이지 않았으며, 다만 군사력과 연결되는 삼군의 총제를 보강하였다. 승추부는 1403년(태종 3) 6월 삼군에 각각 도총제부를 두어 다시 분리되었다가, 1405년(태종 5) 육조의 지위가 높아지고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병조에 합병되었다. 1409년(태종 9) 병조에 치우쳐 있는 군사관계 업무를 분산시키기 위해 새로이 최고 군령기관으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두어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곧 의흥부(義興府)로 개칭되어, 군정은 병조가, 군령은 의흥부가 담당하였다. 1412년 7월 의흥부가 다시 혁파되고 군령·군정권이 병조로 넘어갔으나 1414년을 전후로 진무소가 복설(復設)되었다. 삼군부의 계통을 이은 삼군진무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중앙군이 5위 체제로 되면서부터이다. 즉, 1453년(단종 1) 7월 당시 12사(司)로 불어났던 중앙군이 5사(五司)로 되자 삼군은 중군 밑에 3사를, 좌·우군 밑에 각각 1사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5사가 오위(五衛)에 병합되어 부대편성과 진법체제가 일치되는 중앙 군제가 확립되면서 삼군이라는 편성은 없어지고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로 개칭되었다. 1466년 오위진무소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칭되면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 李在勳, 「朝鮮 太宗代 三軍鎭撫所의 成立과 國王의 兵權 掌握」, 『史叢』61, 2005.
  • 李在勳, 「太宗·世宗代의 三軍都摠制府」, 『史學硏究』69, 2003.
  • 韓忠熙, 「朝鮮初 義興三軍府 硏究」, 『啓明史學』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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