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훈(朴世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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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8년(성종19)~1553년(명종8) = 6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에 활동한 유일(遺逸), 효자. 자(字)는 훈지(勳之)이고, 호(號)는 송촌(松村)· 백촌(栢村)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인데, 경기도 남양(南陽) 출신이다.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박사화(朴士華)의 아들이고, 승지(承旨)박세희(朴世熹)· 관찰사(觀察使)박세후(朴世煦)의 형이다.

중종 시대 은둔 활동

1507년(중종2) 나이 20세 때 어머니의 독촉으로 마지못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다가 합격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간 다음에는 초지(初志)를 지키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만 잠심(潛心)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의 아우 도원재(道源齋)박세희가 조광조(趙光祖)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데, 사림파(士林派)가 중종 시대 조정에 진출하여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게 되자, 1519년(중종14) 조광조가 학문과 덕행이 높다고 하여 그를 별과(別科)에 천거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우(孝友)한 사람이 이제 또 나왔다.” 하였으나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가 조정에서 축출되자, 그도 천거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그의 둘째 아우 박세희가 조광조· 김정(金淨) 등 여러 친구들과 도의(道義)로써 깊이 사귀는 것을 보고 그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너무 훈구파(勳舊派)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 근심하여 경계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는 까닭은 미움이 지나친 것인데, 너를 어지럽히는 미움이 너무 굳세다. 앞으로 화가 너 자신에게 미칠까봐 염려된다.” 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였다.

아우 박세희가 평안도(平安道) 강계(江界)에 귀양 가서 10여 년을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동안, 1522년(중종1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경기도 남양(南陽)에 있는 묘소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갖추어 효성을 극진히 다하고, 귀양 간 아우를 못 잊어 하였다. 상기를 끝마친 뒤에 사론(士論)이 조금 진정되자, 조정에서 벼슬에 임명하는 관명(官命)이 여러 번 내려져서,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에까지 이르렀으나, 번번이 사은숙배(謝恩肅拜)만 하였을 뿐이고 끝내 벼슬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 남양에서 오로지 학문을 닦아서 실천을 하는 데에 힘쓰고, 또 향리(鄕里)의 자제들을 모아서 가르치면서, 항상 효우의 도리를 권면하며, 일체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교화되어 그 행실이 돈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하였다. 1553년(명종8) 10월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세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나이 8세에 능히 『효경(孝經)』· 『소학(小學)』 등의 서적에 통달하였으며, 이미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어렸을 때 서울 주자동(鑄字洞)에 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교관(敎官)에게 수학하였다. 교관이 그 효성(孝誠)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매우 기특히 여기고 항상 그를 “주자동 효자아이[鑄洞孝兒]”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그 행한 바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그 별명을 부르고 모두 칭찬하였다. 자라면서 문명(文名)이 높아졌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만 잠심하였는데, 오직 맏아들로서 부모를 받들고 정성껏 봉양하였다. 나이 겨우 17세가 되던 해 1504년(연산군10)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사(喪事)에는 모든 예절을 갖추어 행하고, 제사에는 그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양(南陽: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안곡)에 있는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 하면서 3년 동안 죽을 먹고 슬퍼하다가 몸이 상하니, 와서 보는 향리(鄕里)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였다. 집 뜰에 송죽(松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서 소영(嘯詠)하여 세한(歲寒)의 뜻을 보이니, 학자들이 그를 ‘송촌선생(松村先生)’이라고 불렀다. 아들 7인이 있는데,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은 상지가(相地家)의 풍수설(風水說)에 얽매이지 말고 부모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 달라.” 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안곡(安谷)의 부친 산소 옆에 있다. 1626년(인조 4)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1668년(현종9) 남양의 안곡서원(安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직재집(直齋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한수재집(寒水齎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