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試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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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관·무관·각 군영의 장관·금군 등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활쏘기 시험.

개설

활쏘기는 선사시대부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숙달해야 하는 무예였다. 조선에서도 활쏘기는 권장되었으며 효율성을 한층 높이고자 문무관·군사 등을 망라하여 활쏘기 시험을 실시해서 그 성적에 따라 선발과 포상, 또는 징벌을 가하였다. 초창기에는 간헐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대상도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중기에 들어오면서 정례화되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체계화되었다. 『속대전』에 이르러 실시 대상과 방식·성적에 따른 상벌 내용 등이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민간에서도 활쏘기는 모두가 익혀야 할 재주로 인식되었고, 활 잘 쏘는 사람을 뽑기 위한 시험이 다채롭게 시행되었다.

연원 및 변천

활쏘기는 전근대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무예 연습이었다. 먼 옛날부터 육예(六藝)의 하나로 간주되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이로 인하여 시대를 초월해서 공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활쏘기를 연마하도록 권장하였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미 태조대부터 활쏘기가 국가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어 그 진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에도 무관이나 군사뿐만 아니라 문관들에게도 활쏘기를 장려해서 실력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활쏘기 연마의 효율성을 한층 높이고자 국가에서는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활쏘기 시험이 독립되어 정기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무관의 등용문인 무과(武科)라든가 중앙 금군(禁軍)을 뽑는 시험인 취재(取才) 중 한 과목으로 활쏘기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나무로 된 화살을 쏘거나 철로 제작한 것을 발사하기도 하고, 서서 쏘거나 말을 타면서 쏘았다. 서서 활 쏘는 것을 보사(步射), 말 타면서 활 쏘는 것을 기사(騎射)라고 하였다.

그런데 활쏘기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시험의 한 과목으로써가 아니라 활쏘기 시험 자체만 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중에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종대에는 문신시사(文臣試射)를 실시하여 문신 가운데 활 잘 쏘는 자를 뽑아 무반(武班)승지(承旨)로 일컬어지는 선전관(宣傳官)의 직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는 장차 그들을 유장(儒將)으로 삼으려던 조치였다(『중종실록』 4년 1월 24일). 문과 무를 각기 상대편에게 익히게 해서 불화를 사전에 차단하여 관료 체제를 안정시키려던 것이다.

활쏘기 시험인 시사는 다양한 형태로 실시되어 문신뿐만 아니라 많은 계층이 참여하였다. 무신시사(武臣試射)도 당연히 행해졌는데, 처음에는 무신시사 결과에 따라 상품으로 활과 화살 등을 성적 순서대로 차등 있게 내려 주는 정도였다(『중종실록』 3년 12월 1일). 그러다 점차 관직을 제수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우수자를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서 장수의 직임에 예비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5년 4월 20일).

봄에 춘등(春等) 시사를 실시하고 ‘규례에 따라 포상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사가 정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중종실록』 19년 5월 3일). 그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1등을 기록한 무반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게 동반(東班)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하자(『중종실록』 27년 5월 24일), 그 정당성을 놓고 조정에서 몇 차례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한층 고조되었다. 화포나 조총 등이 실전에서 널리 활용되었으나 활쏘기의 비중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활쏘기 시험을 한층 체계화하여 실력 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문관 당상관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관직자에게 의무적으로 시험에 응하게 하고 그 성적에 따라 포상과 징계를 가하였다. 점차 군사를 선발하거나 녹봉을 지급하는 데도 시사를 활용하였다. 그에 대한 상세한 규정은 『속대전』을 비롯한 여러 법전에 기록되었다.

절차 및 내용

『속대전』에는 문신당하관을 비롯하여 무신당상관·무신당하관·각 영(營) 장관(將官)의 활쏘기 시험 내용이 기록되었다. 먼저 문신당하관의 경우 매월 20일에 50세 이하인 사람은 시험에 응해야 했다. 대간, 감찰, 궐내 입직(入直)한 자, 사신으로 파견되는 자, 휴가를 받아 향리로 내려간 자, 아직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지 못한 자 이외에는 빠지지 못하였다. 병을 칭탁하고 응시하지 않은 자는 의금부에서 추고(推考)하였다. 매년(해마다) 6월과 12월[歲抄]에 점수를 합산하여 만 500분(分) 이상인 우등자에게는 관직의 품계를 올려 주었다[加資]. 과녁의 거리는 120보(步)였다. 해가 길 때에는 15순(巡)을 쏘아서 35분 이상을 받아야 하고 해가 짧을 때에는 10순을 쏘아 25분 이상을 받아야 했다.

무신당상관에 대해서는 매월 17일에 시사를 실시하였다. 당상 무관으로서 관직이 있는 자와 관계(官階)만 있고 직사(職司)가 없는 한산인(閑散人)이 응시하였다. 17일에 못하면 그 달 안의 다른 날로 연기하였다. 3·6·9·12월에 점수를 합산하여 한산인의 경우 15발 이상을 득점한 자는 50과(窠)에 한하여 녹봉을 주었다. 연이어 세 차례 수석하거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추(騎芻)와 총통에 화살 여러 개를 넣고 한 번에 쏘는 편전(片箭)에서 만점을 받은 자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었다. 4발 미만으로 득점한 자와 병으로 응시하지 못한 자는 모두 파직시켰다. 살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유엽전(柳葉箭)은 8순을 쏘게 하였으며 편전은 1순을 쏘게 하였다. 기추는 1차만 치게 하였다.

무신당하관의 경우 매월 22일 병조 판서가 실직(實職)당하관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하였다. 병조 판서가 사정상 시험을 주관하지 못하면 병조 참판이 시험 보는데 병조 참판마저도 사정이 생기면 날짜를 연기하였다. 6월과 12월은 실시하지 않았다. 단순(單巡)에 즉 한 번에 만점을 기록한 자는 왕에게 별도의 명단을 올리되 여러 순을 쏘아 점수를 채운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득점이 4발 미만일 경우에는 태거(汰去)시키되 기추는 점수를 2배로 하여 4발에 충당하게 하였다. 유엽전은 7순을, 편전은 2순을 쏘게 하였으며 기추는 1차만 치게 하였다. 쇠로 만든 화살인 철전(鐵箭)은 100보 떨어진 곳에서 쏘았는데 1순을 쏘게 하였다.

각 영 장관의 경우 병조 판서가 매월 무신당하관의 월례 시사 때 함께 시험 보았다.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삼군문(三軍門)의 군사를 거느린 장관을 시험하여 25발을 맞춘 자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26발 이상을 적중시킨 자는 변방에서 근무하는 장군에 임명하며, 연이어 3차례 수석한 자는 왕에게 보고하여 별도로 상을 주었다. 4발 미만인 자는 면직시켰다. 각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지 않은 장관들은 각자 해당 군영에서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상벌은 삼군문 장관의 규정과 같았다. 기추의 점수를 2배로 하는 것은 무신당하관과 같았다. 철전은 100보 떨어진 곳에서 쏘았으며 1순을 쏘게 하였고 무과 출신은 90보로 하였다. 편전은 2순, 유엽전은 7순을 쏘게 하였다. 기추는 1차례 치게 하였다.

금군은 활쏘기 시험으로 선발하였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매년(해마다) 5월과 11월에 병조 판서가 시험하여 뽑았는데 득점한 화살 수에 따라 녹봉을 주었다. 어느 한 무술에서 만점을 얻은 한량(閑良)전시(殿試)에 직접 응시하게 하고, 무과 출신이면 관계를 올려 주었다. 별시(別試)에서 철전을 쏘아 150보 이상 거리에 이르게 한 자는 어느 한 무술에 만점한 자와 같이 취급하였다. 유엽전은 3순을 쏘게 하였고 기추는 1차례 치게 하였다.

이처럼 화약 무기가 널리 보급된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도 문무관과 각 영 장관, 금군 등은 활쏘기 시험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활쏘기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무술 수련법이었던 만큼 그 유래가 매우 깊었다. 조선에서도 활쏘기의 생활화를 추구할 만큼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계층에서 활쏘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고을별·단체별로 대회나 시합 등을 개최해서 상이나 혜택을 주기도 하였으며 이것은 곧 민속놀이로 발전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매년 3월에 서울과 지방의 무사(武士)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설치하고 편을 나눠 대회를 열어 승부를 겨루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을 활용해서 민간의 뛰어난 명사수들을 발굴하고자 수령이 직접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면은 1702년(숙종 18)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형상(李衡祥)이 도내 각 고을의 순회 장면을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한 장면인 「명월시사(明月試射)」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같은 해 11월 14일 명월진성(明月鎭城)에서 제주목사의 주관 아래 실시된 시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교사장(敎射長) 17명과 사원(射員) 141명이 있는데 전자는 활쏘기를 가르치는 교관이며, 후자는 응시하기 위하여 시험장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같은 이형상이 저술한 제주도 인문지리지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따르면 각 고을마다 교사장을 차출해 이들로 하여금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연습시켜 1일·15일로 표적지를 관아에 바치게 하여 상벌을 시행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점검하기 위해서 시사를 실시하였다. 다른 진을 갔을 때에도 강사(講射)나 시사를 시행하였다.

민속놀이로 발전할 만큼 활기를 띠었던 활쏘기를 더욱 장려하고 민간의 우수자를 뽑아서 군사력을 증강하고자 수령들이 때로 시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권4,兵典, 試取 『대전회통(大典會通)』권4, 兵典, 試取 『탐라순역도(耽羅巡歷圖)』明月試射
  • 김우철, 『조선 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최효식, 『조선 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 김상옥, 「조선후기 제주의 방어」, 『耽羅巡歷圖硏究會論叢』, 2000.
  • 윤훈표, 「조선 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학예지』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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