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송(山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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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와 관련된 소송.

개설

산송(山訟)은 16세기 이후 종법 질서의 확산 과정에서 부계 조상의 분묘(墳墓)에 대한 수호 의식의 강화를 바탕으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8~19세기를 거치며 사회경제적 성장으로 하층민까지 관련되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조선후기 분묘를 수호하는 양반 사대부가는 말할 것도 없고 평·천민 가정까지 산송을 겪거나 연루되지 않은 집안이 드물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적 의례가 정착하고 종법 의식이 확립되면서 부계 조상의 분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어 갔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부계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거나 실전묘를 회복하는 등의 위선사업(爲先事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분산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는 현상을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길지에 조상을 모시기 위한 풍수설의 유행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해하거나 경계가 충돌하면 곧 산송으로 발전하였다.

분산의 규모와 경계는 고려시대부터 법제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법제를 계승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분산의 규모를 규정하였는데,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차등을 두는 차등보수(差等步數) 제도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경국대전』의 규정보다는 풍수설에 근거한 지세의 흐름을 중시하여 주산(主山)안산(案山)을 비롯하여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까지 수호 범위를 확대시켜 갔다. 이와 같이 분산의 수호 범위를 좌청룡 우백호까지 확대하는 것을 용호수호(龍虎守護)라 하였는데 이는 불법적인 광점(廣占)에 해당하였으나 16~17세기 사대부들은 이를 관철시켜 갔다. 결국 1676년(숙종 2) 3월에 숙종은 사대부들의 분산 안에 청룡·백호 내의 양산처(養山處)에는 다른 사람의 입장(入葬)을 허락하지 말라는 하교를 내리기에 이른다(『숙종실록』 2년 3월 4일). 사대부들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용호수호를 법적으로 공인한 것이었다. 이후 『속대전(續大典)』에 정식 법 조항으로 수록하였다.

그런데 용호수호는 지세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에 차등보수와 달리 주관적인 거리 개념이었다. 그래서 용호의 범위를 놓고 분묘를 조성하는 자 사이에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용호수호를 공인하면서 『경국대전』의 규정을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규정이 충돌하는 현상도 초래하였다. 특히 차등보수를 벗어나는 지역도 용호보수 안쪽에 위치하면 언제든지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내포하였다. 차등보수를 벗어나지만 용호수호 범위 내에 들어있어서 금장(禁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숙종대 용호수호는 오히려 산송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내용

산송이 실록에서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 중반이다. 1664년(현종 5) 11월 사간원에서 경기도관찰사이시매(李時梅)를 산송을 지체시킨 책임을 물어 탄핵한 사건이 최초의 기록이다(『현종실록』 5년 11월 6일). 비슷한 시기에 『수교집록(受敎輯錄)』과 같은 법전에서도 산송에 대한 규정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산송은 조선후기를 거치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성행하였다. 18세기 초반 영조대의 전교(傳敎)에서 요사이 상언(上言)한 것을 보면 산송이 10의 8, 9에 달한다고 하였다(『영조실록』 3년 3월 20일). 19세기 초반 정약용(丁若鏞)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싸우고 구타하는 살상(殺傷) 사건의 절반이 산송 때문 일어난다고 하였다. 산송이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비변사에서는 산송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새로운 절목(節目)을 만들기보다는 소송관이 세력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법에 근거하여 판결할 것을 강조하였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양반 사대부들은 드러내놓고 소송에 휘말리는 것 자체를 꺼렸다. 그러나 산송은 조상의 분묘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상중(喪中)에는 진행하던 소송도 중지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산송은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 즉 상중에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소송은 분묘를 조성하려는 투장자(偸葬者)와 새로운 분묘의 조성을 막으려는 금장자(禁葬者)의 대결 구도를 띠었다.

소송의 발단은 투장자나 금장자가 소송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상대방을 고소하는 소지(所志)를 제출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소송관은 주로 분산이 위치한 고을의 수령이 담당하였다. 소지를 받은 수령은 원고에게 피고와 함께 관아로 나올 것을 요구하고, 원고와 피고가 함께 소송장에 출두하면 본격적으로 소송이 진행되었다. 소송의 전개 과정은 일차적으로 소송관이 원고·피고와 함께 분쟁이 발생한 현장을 답사하고 산도(山圖)를 작성하였다. 산도에는 분산의 주맥(主脈) 흐름, 각 분묘들의 위치와 거리 등을 표시하고 원고와 피고의 확인 서명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소송관은 두 분묘의 위치와 선후 관계를 따져서 묘를 파낼지 그대로 둘지를 결정하여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산송은 판결을 내린 다음에 오히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소송관이 묘를 파낼 것을 명할 경우에도 투장자가 묘를 파내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일이 흔하였다. 묘를 파낼 날짜를 약속한 후에도 기한을 넘기기 일쑤였고 옥에 갇히는 상황도 감수하였으며, 버티지 못할 경우에는 도피하는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한편 소송관이 묘를 그대로 두도록 판결하면 금장자가 승복하지 않고 재차 삼차 묘를 파낼 것을 요구하였다. 묘를 파낼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관의 허락 없이 불법적으로 묘를 파내 버리는 사굴(私掘)도 마다하지 않았다.

산송은 조상의 분묘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도리, 즉 위선(爲先)의 실현과 효의 실천을 의미하였다. 자손의 입장에서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가문 간의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산송은 한번 발생하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하면서 격화하는 체송(滯訟)과 격송(激訟)을 특징으로 한다. 향촌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상경정소(上京呈訴)로 이어져 국왕에게 상언·격쟁(擊錚)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십년에서 수백년에 동안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는 등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이었다.

변천

18~19세기를 거치면서 산송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을 바탕으로 사대부 계층뿐만 아니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다. 유교적 상장례와 종법 의식이 중인 및 평민층 이하로 확산되면서 하위 신분층에서도 성대한 상장례와 함께 독립 분산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증대하였다. 이들은 분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적 능력과 읍권(邑權)을 동원하고, 현실적으로 세력이 약한 이들은 몰래 매장하고 도피하는 등 다양한 방식들을 시도하면서 산송의 사회적 확산에 일조하였다. 이와 함께 18세기 후반 이후 분산의 매매(賣買), 송추투작(松楸偸斫), 향촌 공동체의 금송계(禁松契) 등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하면서 산송은 다양화되었다.

투작은 분산 수호에 수반되는 산림 이용권에 관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분산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산림 생산물을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으로 인한 충돌이었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을 바탕으로 산림의 활용도가 증가함에 따라 각 계층마다 산림 이용권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해하여 불법적으로 화전(花田)을 일구거나 땔나무 및 송추를 베어가는 투작이 성행하였다. 투작은 평민층들이 중심을 이루는데 생계유지 차원이라는 특성을 띠었다. 또한 조선후기 온돌의 보급에 따른 땔나무의 수요 급증과 관련하여 시초(柴草) 채취가 투작의 한 원인이었는데 이 모든 투작 행위가 산림 황폐화의 주범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수교집록(受敎輯錄)』
  • 『목민심서(牧民心書)』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김선경,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소유권의 실태」, 『동방학지』77·78·79, 1993.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한상권, 「조선후기 산송의 실태와 성격 : 정조대 上言·擊錚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곡논총』2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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