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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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9년(세종 11)~1459(세조 5) = 31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4왕자. 봉작(封爵)은 한남군(漢南君)이고, 자는 군옥(群玉)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양혜빈(楊惠嬪)은 청주 양씨(淸州楊氏)로서 남평 현감(南平縣監)양경(楊景)의 딸인데, 단종을 맡아서 양육하였다. 양혜빈의 3남 중에서 맏아들인데, 동복아우가 수춘군(壽春君)이현(李玹)과 영풍군(永豊君)이전(李瑔)이다.

세종~단종 시대 생활

1440년(세종 22) 2월 나이 12세 때에 예빈시(禮賓寺) 녹사(錄事)권격(權格)의 딸과 혼인하였다. 1441년(세종 23) 3월 17일 왕과 소헌 왕비가 온수현(溫水縣)으로 행차할 때,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와 함께 도성에 남아서 수궁(守宮)하였다. 7월 23일 세자빈 권씨(權氏: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돌아가자, 세종은 양혜빈의 어머니 이씨를 봉보부인(奉保夫人)으로 삼아 단종을 궁궐 바깥에서 기르게 했고, 양혜빈에게 단종을 맡아서 보육하도록 명하였다. 1442년(세종 24) 6월 권격의 막내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뽑혀서 권승휘(權承徽)가 되었는데, 권승휘는 한남군 부인의 막내동생이다. 권승휘는 문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소용(昭容)이 되었다. 이해 7월 한남군으로 봉해졌다. 1445(세종 27) 외조부 현감양경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11월 한남군에게 빌붙어 시양(侍養)이라 일컫고 장사해서 돈을 번 개성부의 부상(富商) 이건직(李乾直)이 죽자, 한남군이 시양 아들이라고 일컫고 그 재산을 빼앗았다. 이건직의 부인 고온(古溫)이 자신의 옛날 주인이었던 중추원(中樞院) 사(使)이승손(李承孫)에게 찾아가서 하소연하여 이승손이 종부시(宗簿寺)에 소송하였다. 한남군이 자진하여 그 사실을 문종에게 진달하였고, 이승손의 소송한 첩장이 불공(不恭)한 말이 많았으므로, 고온과 이승손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여, 그 진상이 밝혀졌다. 이에 문종은 한남군과 이승손을 파직시키고, 한남군이 빼앗은 재산을 이건직의 아내 고온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1451년(문종 1) 5월 다시 한남군이 되었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자, 의정부에서는 양혜빈이 세자를 보호하여 기른 은혜가 있다하여 대내(大內)에 들어와 단종을 보호하도록 하니, 양혜빈이 내전으로 들어와서 한 동안 내정(內政)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그해 6월 11일과 7월 9일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강맹경(姜孟卿)이 양혜빈이 궁중을 오로지하므로, 문종의 후궁 홍귀인(洪貴人)의 작위를 높여 궁중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8월 7일 홍귀인을 숙빈(肅嬪)으로 삼고 궁중의 일을 양혜빈 대신 도맡도록 하였다. 홍숙빈의 어머니 윤씨는 세조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사촌 자매였다. 1453년(단종 1) 10월 한남군이 심하게 병을 앓았는데,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1452년(단종 2) 1월 단종의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이 간택에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 단종의 왕비로 뽑혔다.

단종 복위 운동

어머니가 단종의 양육자였고, 처제가 문종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한남군은 세조의 즉위에 반대하였다. 한편, 1455년(단종 3) 영천위(鈴川尉)윤사로(尹師路)가 수양대군에게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영풍군이 수상하다고 아뢰었는데, 여기서 수양대군 일파는 양혜빈의 아들들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윤6월 11일 세조가 즉위하자 한남군이어가 양혜빈, 영풍군이전, 금성대군, 박상궁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고변이 있어 모두 유배되었는데, 한남군은 금산(錦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사간원에서 엄벌에 처할 것을 청하니, 아산(牙山)으로 이배(移配)되었고, 8월 15일 가산(家産)을 적몰당하고, 18일 양지(陽智)로 이배되었다. 청풍(淸風)으로 유배되었던 어머니 양혜빈은 11월 9일 교수형을 당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6월 26일 고신(告身)이 거두어졌고, 더 먼 지방으로 안치하라는 명에 따라 6월 27일 경상도 함양(咸陽)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순흥부사(順興府使)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였는데, 1457년(세조 3) 6월 안동(安東)의 관노(官奴)이동(李同)이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이징석(李澄石)에게 제보하여, 판사이징석이 고발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10월 16일 임영대군이구와 좌의정정창손(鄭昌孫)의 주장에 따라,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부사이보흠과 함께 처형되었고, 순흥부는 폐지되어 풍기군에 소속되었다. 또 양녕대군과 영의정정인지(鄭麟趾)가 종친과 백관들을 거느리고 단종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므로, 단종은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0월 20일에는 양녕대군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이 그 죄가 같다고 죄를 청하였으므로, 한남군과 영풍군은 유배지에서 외지로 나가지 못하도록 금방(禁方)되었고, 종친록(宗親錄)에서 삭제되었다. 1459년(세조 5) 5월 29일 유배지 경상도 함양에서 병으로 졸하니, 향년이 31세였다.

묘소와 후손

1485년(성종 16) 6월 29일 한남군 아들 이중생(李衆生)이 한남군의 고신과 가산을 돌려받기를 간청하자, 성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려주었다. 1520년(중종 15) 이중생의 아들 이옥근(李玉根)이 상언하여, 한남군이어의 후손들의 이름을 다시 『선원록(璿源錄)』에 올려달라고 하소연하니, 중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1731년(영조 7) 영조에 의해 단종의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6종영(六宗英)을 차례로 배향(配享)할 때 한남군이어도 함께 모셔졌다. 6종영은 세종의 적출 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금성대군이유(李瑜)과, 세종의 서출 왕자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 한남군이어(李*), 영풍군이전(李瑔)과, 태조의 제 8왕자 의안대군의 손자인 중추원 판사이양(李穰)을 말한다.

1742년(영조 18) 12월 시호를 정도(貞悼)라고 내렸다.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산755-11번지에 있다. 한남군이어가 귀양살이 하였던 경상도 함양 유배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휴천 계곡의 새우섬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서 그 마을을 ‘한남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1867년(고종 4) 함양 유생들이 새우섬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고 이름하여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는데 1936년의 홍수로 쓸려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호조 정랑(正郞)권격(權格)의 딸인데,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이중생이고, 1녀는 정문명(鄭文明)의 처가 되었다. 이중생은 아버지 한남군과 함께 유배되었는데, 1482년(성종 13) 7월 어머니 권씨가 성종에게 상소하여 아들 이중생을 방면하여 달라고 하소연하자, 유배지에서 석방되었고, 1490년(성종 21 연좌에서 풀려났다. 사후에 흥안군(興安君)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