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尹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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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3년(선조 36)∼1641년(인조 19) = 39세]. 조선 후기 인조(仁祖) 때의 문신. 사헌부 장령(掌令)과 칠곡부사(漆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심원(深源)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윤응열(尹應說)이고, 어머니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김전(金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를 지낸 윤흥복(尹興福)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윤기(尹機)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1631년(인조 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방목』] 처음에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었고, 그해 12월 전경문신(專經文臣)으로 선발되었다.[『송곡집(松谷集)』 권10 「칠곡부사윤공묘지명(漆谷府使尹公墓誌銘)」 이하 「윤양묘지명」으로 약칭] 이때 예조에서는 30세 이하의 인재로 전경문신을 선발하였는데, 윤양을 비롯하여 이기발(李起浡)과 강백년(姜柏年), 정태화(鄭太和)등 장래가 촉망 되는 인물들이 이때 뽑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12월 26일] 전경문신은 문신으로 하여금 본직(本職)에 근무하면서 틈을 내어서 경학(經學)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라의 일이 많아지면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장차 왕의 경연(經筵)이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경전을 강론할 때 특진관(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다.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10만 명의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곧 바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왕자와 비빈(妃嬪)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 강화도로 피하도록 하였다. 인조도 뒤따라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하였으나, 청나라 군사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윤양(尹瀁)은 도보로 어가(御駕)를 뒤따랐는데, 대가(大駕)가 강화도로 들어간 줄로 알고, 허겁지겁 강화도로 달려갔다. 이때 검찰(檢察) 부사(副使)이민구(李敏求)가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용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의 분사(分司)가 설치되자, 또 그 낭청(郎廳)이 되었다. 윤양은 오랑캐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고 간청하였으나, 분사(分司)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때 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과 검찰 부사이민구는 분사 대신(大臣)인 윤방(尹昉) 및 김상용(金尙容)과 상의하지 않고 마음대로 분사의 모든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그런데 두 검찰사는 외교의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일본과 명(明)나라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논의만 일삼았다. 이들은 분사의 관원을 모문룡(毛文龍)이 있는 가도(椵島)로 파견하여 명나라의 후원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윤양은 그 무익함을 역설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논의하기도 하였는데, 윤양은 이 계획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복해 주장하였고, 결국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윤양묘지명」] 이때 분사에는 전 영의정윤방과 전 좌의정김상용이 종묘(宗廟)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 왔다가 분사가 설치되자 책임자에 임명되었으나, 이들은 실지로 분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1637년(인조 15) 1월 그는 군량미를 구하려고 충청도로 갔는데, 그가 돌아오기 전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그해 6월 연원찰방(連原察訪)으로 나갔다가, 곧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큰 난리를 겪은 뒤여서 나라에 일이 매우 많았는데, 어전(御前)에 입시(入侍)하면 왕의 언행(言行)을 기주(記注)하는 것이 사관(史官)의 임무였으므로, 그는 왕의 언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나는 듯한 빠른 필치로 자세하게 쓰면서도, 문장 또한 아름답고 매끄러워서 왕의 칭찬을 받았다.[「윤양묘지명」]

1638년(인조 16)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거쳐서 병조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고,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6년 5월 22일, 「윤양묘지명」] 1639년(인조 17)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겨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원하여 결성현감(結城縣監)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7년 9월 15일] 그 치적(治績)이 뛰어났으므로 그가 떠나올 때에 수천 명의 백성들이 관아를 에워싸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가 떠나온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추모하였다.[「윤양묘지명」]

1640년(인조 18) 5월 칠곡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정가산성(定架山城)의 이름을 칠곡(漆谷)이라고 고치고 새로 고을을 설치하였다.[『인조실록』 18년 5월 25일] 이조에서는 새 고을의 부사(府使)를 임명하는 것인 만큼 지극히 정선(精選)하여 수령을 선발하였다.[「윤양묘지명」] 그가 부임하니 성안은 텅 비어 있고 한 가지도 갖추어 진 것이 없었으므로, 밤낮으로 고심하고 세심하게 계획하여, 군기(軍器)를 완비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점차 백성들이 모여들어 고을다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윤양묘지명」] 그는 고을을 위하여 백방으로 심혈을 기울이다가, 1641년(인조 19) 7월 과로로 쓰러져서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였다.[「윤양묘지명」]

성품과 일화

윤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정성스럽고 책임감이 강하였으나,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서, 집이 지극히 가난하였음에도 홀로 된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아우 둘과 누이 셋을 잘 교육시키고 성취시켰다. 또 평생 심력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윤양묘지명」]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서 혼자 글을 읽고 문장을 지을 줄을 알았다. 처음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에는 그를 천거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성균관 학유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직임을 맡아서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니, 그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명성이 크게 떨쳤다. 모두 앞으로 나라에 크게 쓰일 인재라고 칭찬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윤양묘지명」]

칠곡부사으로 부임할 때에 고을이 새로 생겨서 아무런 설비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가족을 데리고 함께 기거(寄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오래도록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으므로, 친한 친구인 이웃 고을 비안현(比安縣)의 수령에게 부탁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그 고을에 잠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한 달에 한번 근친(覲親)하는 것을 허락하고 다달이 쌀을 보내주었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자, 고을 사람들이 칠곡으로 모셔다가 병을 구완하도록 청하였으나, 그는 소신을 지키고 따르지 않았다. [「윤양묘지명」] 결국 칠곡 고을을 새로 만들면서 비안의 어머니를 뵈러 오가다가 마침내 과로로 쓰러졌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진벌리(榛伐里)에 있고, 송곡(松谷)조복양(趙復陽)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윤양묘지명」]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정연(鄭王寅)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윤하주(尹夏柱)는 생원(生員)이다. 장녀는 병조 판서(判書)박서(朴澨)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홍만종(洪萬鍾)에게 출가하였다.[「윤양묘지명」] 손자 윤경훈(尹景勳)는 문과 급제하였으나, 조부 윤양처럼 일찍 죽었기 때문에 벼슬이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그쳤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사기문(逸史記聞)』
  • 『노서유고(魯西遺稿)』
  • 『송곡집(松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