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걸(邊良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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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6년(명종1)~1610년(광해군2) = 65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국화(國華)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주거지는 황해도 배천(白川)이다. 아버지는 예조 좌랑변위(邊偉)이고, 어머니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부장(部將)민희현(閔希賢)의 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용양위(龍驤衛) 부장(部將)에 임명되었고, 강계판관(江界判官)과 군기시(軍器寺) 판관을 거쳐 벽동군수(碧潼郡守)로 나갔다가, 군기시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초배(超拜)되었다가 인산진첨사(麟山鎭僉使)로 옮겼고,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갔다. 1583년(선조16)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갔는데, 오랑캐가 두만강을 건너 경원부에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출전하였다. 그런데 주장(主將)이 그가 적을 보고 두려워서 전진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서북 변방으로 귀양갔다. 얼마 안 되어 순천부사(順天府使)로 발탁되었고, 1591년(선조24)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변양걸(邊良傑)은 수군을 거느리고 육로로 연강(燕江)에 이르러 왜적을 맞아 싸워 이겼다.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뱃길로 식량을 조달하는 한편, 수군을 이끌고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강화도(江華島)를 굳게 지키니, 조정의 명령이 뱃길로 충청도 · 전라도에 통할 수 있었다. 1593년(선조26) 서울의 수호대장(守護大將)이 되었고, 이어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전쟁 중에 반역하는 무리들을 체포하였으므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하여 도총부(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남도절도사(咸鏡南道節道使)로 나갔다. 1597년(선조30) 황해도절도사(黃海道節道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경기우도방어사(京畿右道防禦使)로 전직되었다.

1599년(선조32) 명(明)나라 군사들 중에서 탈영하여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난동을 일으켰는데, 그 난동을 신속하게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거쳐, 훈련원 지사가 되어 비변사(備邊司)의 군국대사를 논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01년(선조34) 일본의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서 통호(通好)하기를 간청하자, 선조가 재상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 통호를 찬성하였으나, 변양걸만은 홀로 반대하기를, “국치(國恥)를 씻지 못한 것이 한인데, 어찌 감히 화의(和議)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조가 그의 말이 옳다 여기고 통호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602년(선조35) 조정 대신들이 연명으로 장계(狀啓)하여 명나라에 세자(世子: 광해군) 책봉을 청하였을 때, 훈련원 지사변양걸은 무직배신(武職陪臣)의 대표로 일컬어졌다. 이를 통해 변양걸이 당시 무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604년(선조37)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서울의 치안을 바로 잡았다. 그때 도적들이 유성군(儒城君)유희서(柳熙緖)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과 관련하여 유희서의 첩이 사통(私通)한 외간 남자를 조사하던 중,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臨海君)도 그녀와 관계한 정황이 드러났다. 변양걸이 모두 체포하여 국문하고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자, 선조가 대노하여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고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이덕형(李德馨)이 간곡히 변명하고 사면을 간청하여, 곤장 90대를 맞고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 곧 석방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1608년(광해군즉위)에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갔다. 다음해 사헌부에서 제주목사변양걸이 관마(官馬) 10여 필을 훔쳤다고 탄핵하자, 광해군이 그를 파면하였다. 그는 제주도에 있을 때 풍토병을 앓았는데, 서울에 돌아오자 병이 악화되었다. 1610년(광해군2) 7월 18일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무장의 조건-말 타고 활 쏘기

변양걸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1597년(선조30) 행 부사맹으로 있을 때 궁궐에서 무관(武官)들의 시사(試射)에서 세 차례나 일등을 차지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였다. 사간원에서 상전(賞典)으로 가자(加資)하는 것은 참람하다고 아뢰었으나 선조는 “변양걸의 가자는 무방하다.”고 하였다. 1601년(선조34) 그가 무관들의 시사에서 또 수석을 차지하니, 선조는 그 재능의 뛰어남을 칭찬하고 호피(虎皮) 1벌을 하사하였다. 당시 변양걸은 활을 잘 쏘는 명궁(名弓)으로 유명하였다.

또 그는 말을 잘 타고, 말을 아끼는 장수로도 소문이 났다. 1600년(선조33) 대간에서 훈련도감 당상관변양걸이 공마(公馬)를 사가(私家)에서 기르면서 마료(馬料)를 갑절이나 징수한다고 탄핵하였다. 그러나 도제조(都提調)가, 변양걸이 관마를 사가에서 기르는 것은 위급할 때를 대비한 것이고, 도감에서 공급하는 말먹이가 유명무실하여 말이 수척해졌다라고 말한 것을 전하며,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선조는 변양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며 그를 보호해 주었다. 왜란 직후 무장에게 전마(戰馬)가 부족할 때, 선조는 변양걸과 이순신(李純信) 등에게만 제주도에서 진상한 전마에 적합한 아마(兒馬)를 1필씩 주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말을 사랑한 나머지 명마를 탐내고 심지어 말을 훔쳤다고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1) 사헌부에서 제주목사변양걸이 관마 10여 필(匹)을 훔쳐 절반은 해남(海南)에서 여러 명의 종과 맞바꾸었으며 절반은 자기 소유물로 삼아 관아 안에서 기르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광해군은 변양걸을 두둔하였다가 결국 그를 국문하게 하고 파면하였다.

성품과 일화

변양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영특하게 생겨서 귀하게 될 상을 타고났고, 성품은 강인하여 젊어서 한 번 먹은 마음은 늙어 죽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이덕형은 선조에게 변양걸에 대해 “그는 본래 강직하여, 의(義)가 아니면 비록 열 명의 명사(名士)가 그를 움직이려고 하여도 꿈쩍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청음집(淸陰集)』)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법도가 있고 엄격하여 결국 성공하도록 만들었다. 여러 차례 큰 고을의 수령을 맡고 병영(兵營)수영(水營)의 장수를 두루 맡았으나 치부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집이 가난하여 그가 아끼던 말을 팔아 염습(殮襲)하였고, 그래도 비용이 모자라서 집을 팔아 장사를 지냈다. 그는 생전에 친척 중에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 있으면 옷과 음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왜란 때 조선에 왔던 명나라 군사 중에서 탈영하여 숨어버린 자들이 있었다. 1599년(선조32)에 명나라 병부(兵部)에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수색하여 찾아내어 옥에 가두니, 그 잔당 수백 명이 몰래 집결하여 옥에 갇힌 자들을 구출해내고, 도성 밖에 집결하여 난동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일이 급박하게 되자, 도성의 문을 대낮에도 닫았으며, 길에는 감시소를 설치하여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였다. 선조는 변양걸을 불러들여 병부(兵符)를 맡기고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변양걸은 군사를 이끌고 계략을 써서 그들의 취약한 곳을 공격하니, 그 도당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 계엄이 풀리고, 사람들이 마음 놓고 길을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선조도 기뻐하여 다시 그를 훈련대장에 임명하였다. 그때 병졸 가운데 죄를 범한 자가 있어서 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後宮)이 간곡하게 그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는 완강하게 거절하고 마침내 법대로 처형하자, 그 후궁은 앙심을 품고 그를 모함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묘소는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신화리(新化里)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는 충의위(忠義衛)조광종(趙光琮)의 딸로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자는 절도사변흡(邊潝)이고, 장녀는 판관노유명(盧有命)의 처가 되었다. 그의 서녀(庶女)가 좌의정김상헌의 첩이 되었다. 손자 변복일(邊復一)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을 지냈고, 변희일(邊希一)은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 도사(都事)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리집(梧里集)』
  • 『태천집(苔泉集)』
  • 『백사집(白沙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청음집(淸陰集)』
  • 『월사집(月沙集)』
  • 『계곡집(谿谷集)』
  • 『백곡집(柏谷集)』
  • 『몽예집(夢囈集)』
  • 『번암집(樊巖集)』
  • 『쌍계유고(雙溪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