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절(尹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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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5년(인조 3)∼1662년(현종 3) = 38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냈다. 자는 자장(子章)이고, 호는 한송(寒松)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상의원(尙衣院)정(正)을 지낸 윤순거(尹舜擧)이고,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이춘원(李春元)의 딸이다. 양할아버지는 죽산부사(竹山府使)를 지낸 윤수(尹燧)이며, 친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윤황(尹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석호(石湖)윤문거(尹文擧)와 노서(魯西)윤선거(尹宣擧)의 조카이고, 명재(明齋)윤증(尹拯)의 4촌형이기도 하다. 삼학사(三學士)의 하나인 윤집(尹集)의 사위이고,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의 장인이다. 운포(雲浦)여성제(呂聖齊)와 절친한 사이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의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음직(蔭職)으로 침랑(寢郞)이 되었다.[『명곡집(明谷集)』 권24 「홍문관부수찬윤공묘갈명(弘文館副修撰尹公墓碣銘)」 이하 「윤절묘갈명」으로 약칭] 1660년(현종 1)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방목』] 처음에는 추천을 받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윤절묘갈명」]

1661년(현종 2)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다.[「윤절묘갈명」] 그해 10월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접위관(接慰官)에 임명되어 동래(東萊)로 내려갔는데,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일본의 차왜(差倭 : 사신에 임명된 왜인)가 나왔다고 치계(馳啓)하였기 때문이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10월 29일] 그때 동래부(東萊府)의 두모포(豆毛浦)왜관(倭館)에서는 왜인들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동래로 가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동래로 내려가서 접위관에 부임하여 일본의 차왜를 접대하였다.[「윤절묘갈명」] 일본에서는 인조(仁祖) 때부터 동래의 두모포 왜관이 좁다며 왜관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그들의 요구를 조정에 보고하고, 후일에 반드시 옮겨줄 것이라고 차왜를 달랬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효종(孝宗)~현종 때까지 이를 묵살하고 왜관을 옮겨주지 않다가, 30~40년이 지난 숙종(肅宗) 때에 들어서야 부산진(釜山鎭)의 초량동(草梁洞)으로 왜관을 옮겨주었다.

1662년(현종 3)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고 하여 교체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3년 4월 1일, 「윤절묘갈명」] 5월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할 인물을 뽑을 때 윤절(尹晢)을 비롯하여 이숙(李䎘)과 여성제(呂聖齊) 등 10명이 뽑혔다. 그리고 그는 그해 8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3년 5월 18일, 현종 3년 8월 13일] 나중에 이숙은 우의정까지, 여성재는 영의정까지 올랐는데, 그도 오래 살았더라면, 정승판서까지 올랐을 것이다. 이때 그는 위장병[水土病]을 앓아서 몸이 몹시 야위었으나, 다시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접위관에 임명되어 동래로 내려갔다. 위장병이 악화되면서 1662년(현종 3) 8월 17일 동래의 객사(客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38세였다.[「윤절묘갈명」]

현종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접위관윤절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서 객지에서 죽었으니, 매우 불쌍하다. 그를 반장(返葬)할 때 지나가는 각 고을로 하여금 호상(護喪)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사간원 정언여성제가 상소하여, 그의 장례 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은의(恩義)를 극진히 할 것을 청하니, 현종이 그대로 따랐다.[『현종실록』현종 3년 9월 23일, 『현종개수실록』현종 3년 8월 23일, 현종 3년 9월 23일]

성품과 일화

윤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겉모습은 공손하였고, 속마음은 강직하였으나, 도량이 넓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다른 아이들보다 출중하였으므로 할아버지 팔송(八松)윤황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윤절묘갈명」]

그가 너무 이른 나이에 객지(客地)에서 죽자, 여러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겨 글을 지어서 그를 기렸다. 그의 막내 삼촌 노서(魯西)윤선거(尹宣擧)는 “안으로 아버지의 일을 관리하고 밖으로 종친(宗親)들을 거느리니, 가훈(家訓)이 드러나고 묘전(墓田)이 준비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종중(宗中)의 모든 일이 두서가 있게 되었다.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재주가 주도면밀하여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화려한 것에 힘쓰지만, 그는 형식적인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충실한 모습과 독실한 정성을 지녀서, 담담해도 싫증이 나지 않고, 온화해도 잘 다스려졌다. 외모를 보면 온기가 감도는 공손한 사람이었고, 내심을 보면 변함없는 강직한 선비였다. 성균관 생도가 되었을 때부터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고, 벼슬길에 나가서 명망이 날로 높아질수록 행실이 더욱 더 신중하였다.”라고 하였다.[「윤절묘갈명」]

그의 또 다른 삼촌 석호(石湖)윤문거(尹文擧)는 “사시사철 준비가 모두 갖추어져서 그가 실행하는 바는 틀리지 않았다.” 하였고, 그의 4촌 동생 명재윤증도 칭송하기를, “그릇이 넉넉하여 용도에 적응할 수 있었고, 도량이 넉넉하여 사람을 포용할 수 있었다.” 하였다.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은 그의 비명(碑銘)에서, “아버지는 훌륭한 아들을 잃었고 조정에서는 현명한 인사를 잃었으니, 이것이 무슨 천리(天理)라는 말인가. 자신이 누리지 못하면, 후손이 누리는 법이니, 그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윤절묘갈명」] 최석정의 할아버지 최혜길(崔惠吉 : 최명길의 아우)이 이춘원(李春元)의 사위였으므로, 최석정의 아버지 최후량(崔後亮)과 윤절은 이종 4촌간이었다.

윤절은 접위관으로서 동래에 있을 때 기생을 멀리하고 오직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전서(朱子全書)』 등의 책만을 가지고 다녔다. 왜인들을 한결같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대하자, 동래부사가 그에게 보도(寶刀)를 주었다. 그러나 윤절은 이것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주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으므로, 동래부의 사람들과 왜관의 왜인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윤절묘갈명」]

윤절이 일찍이 어머니의 상례(喪禮)를 치를 때, 지나치게 슬퍼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다가 위병을 앓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위장병[水土病]이 크게 악화되어,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절이 동래의 객사에서 임종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사명을 받고 임지(任地)에 나왔다가 임무를 왕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죽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나, 사적인 부탁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윤절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논산(論山) 이산(尼山)에 있는데, 존와(存窩)최석정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절묘갈명」]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충정공(忠貞公)윤집(尹集)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윤도교(尹道敎)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윤덕교(尹德敎)이다. 삼남 윤지교(尹智敎)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지냈으며, 사남 윤인교(尹仁敎)는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냈다. 딸은 좌의정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윤절묘갈명」]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3학사(學士)의 한사람으로 순절(殉節)한 충정공(忠貞公)윤집(尹集)의 딸이다. 단정하고 온화하며 부덕(婦德)을 갖추어 남편을 섬길 때 순종하면서도 예절 바르게 행동하였다. 남편 윤절이 일찍 죽자, 혼자서 씩씩하고 조용하게 4남 1녀의 자식들을 의리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가르쳤는데,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암집(眉巖集)』
  • 『구원집(九畹集)』
  • 『노서유고(魯西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