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현(朴希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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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6년(명종 21)~1661년(현종 2) = 9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순(子醇)이고, 호는 우암(迂菴)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박효원(朴孝元)이다. 할아버지는 귀조서(歸厚署) 별제(別提)를 지낸 박조(朴藻)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형조 참판(參判)을 지낸 박광영(朴光榮)이다. 부인 한씨(韓氏)는 한온손(韓溫孫)의 딸이다. 이문(吏文)에 능하여 중국과의 외교문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박희현(朴希賢)은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2월 원접사(遠接使)이정귀(李廷龜)가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참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중국과 주고받기 위산 순 한문체의 글인 이문으로 등용된 그는 1613년(광해군 5)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으로서 『고사촬요(攷事撮要)』를 증보한 『속고사촬요(續攷事撮要)』를 편찬하였다.[『택당집(澤堂集)』 권9 「중수고사촬요후서(重修考事撮要後序)」, 『부계기문(涪溪記聞)』] 주부(主簿)와 마전현감(麻田縣監)과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봉상시 주부로 인목대비의 폐비를 요청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3]

1630년(인조 8) 10월 마전현감으로 있을 때 인조를 인견하는 자리에서 이문 전공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에 인조는 그의 말이 매우 합당하다고 여겨,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착실히 시행토록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10월 21일] 그러나 1632년(인조 10) 1월 오로지 자기 욕심만 채워 징렴(徵斂)이 끝이 없다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마전현감에서 파직 당하였다.[『인조실록』인조 10년 1월 8일]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