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흠(宋欽)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59년(세조5)∼1547년(명종2) = 89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청백리(淸白吏).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 관수정(觀水亭)이다. 본관은 신평(新平)인데, 주거지는 전라도 영광(靈光)이다. 아버지는 문소전(文昭殿)참봉(參奉)송가원(宋可元)이고,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생원(生員)정필주(鄭弼周)의 딸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0년(성종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이어 1497년(연산군3)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다가 1500년(연산군6) 대사헌안침(安琛)의 추천으로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1502년(연산군8)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의 상기를 마치고 1504년(연산군10)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임명되었다. 그 때 궁중의 일을 함부로 짐작하여 연산군에게 간언(諫言)을 올렸다가 장(杖) 1백 대를 맞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서 후진(後進)들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해서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나갔고, 옥천군수(沃川郡守) · 순천부사(順天府使) ·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연임하였다. 1515년(중종10) 내직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고,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18년(중종13)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1519년(중종14)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 김식(金湜) 등 사림파(士林派)의 젊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이 없어졌다. 그래서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관수정(觀水亭)’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스스로 호(號)를 삼아서 자기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1524년(중종19)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전주부윤으로 나갔다가, 이어서 광주목사(光州牧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연임하였다. 1528년(중종23)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으나, 이듬해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갔다가, 1532년(중종2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장흥부사(長興府使)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다. 1534년(중종29) 그의 나이 77세 때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연세가 99세였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머니는 103세까지 장수하였다. 1538년(중종33)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어, 한성부 좌윤(左尹)에 임명되었고,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어 이조 판서 ·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539년(중종34)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541년(중종36)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송흠이 80세가 넘었다고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영광으로 아주 돌아갈 때 중종이 경회루(慶會樓) 남문(南門)에다 술자리를 베풀어 작별하고, 삼공(三公) 이하 찬성김안국(金安國)과 참찬권벌(權橃), 형조 판서유인숙(柳仁淑)과 사인(舍人)송인수(宋麟壽) · 김노(金魯) 등 조정의 명신(名臣)들이 모두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그를 전송하였다. 그 뒤에도 1543년(중종38) 특별히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리고 중추부 판사에 임명하여, 경연 지사(知事)를 겸임하게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47년(명종2) 11월 15일에 향리(鄕里)의 집에서 죽으니, 향수(享壽)가 89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본래 온순하며 행실은 아주 간결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남에게 굽히지 않았고, 학술의 연마도 사림(士林)의 선비로서 넉넉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외직으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푼다는 소문이 여러 번 중종에게 보고되었고, 내직에 들어와서 정성을 다해 중종에게 간언(諫言)하여, 문무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아주 신중하게 공무를 봉행(奉行)하였기 때문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고, 명환(名宦)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송흠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송흠이 홍문관에 있을 때, 최부(崔溥)가 송흠이 역말을 사사로이 탄 것을 조정에 아뢰어 파면된 적이 있었다. 송흠은 최부의 경계를 받아들여 나중에 지방 수령으로 부임할 때 ‘신영(新迎)의 말(馬)’을 세 필로 제한하여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다 한다. 한편, 송흠이 여산군수(礪山郡守)로 있을 때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고 하였다. 송흠이 개발한 ‘호산춘’은 여산의 전통주로서 조선 시대 4대 명주(名酒)의 하나가 되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묘소는 전라도 영광(靈光) 선방산(船舫山)의 언덕에 있는데, 그의 7세손 송명현(宋命賢)의 부탁으로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1) 부인 하음봉씨(河陰奉氏)는 감찰(監察)봉인(奉寅)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익침(宋益忱)은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차남 송익경(宋益憬)은 낙안현령(樂安縣令)을 지냈으며 3남 송익순(宋益恂)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전라도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명재유고(明齋遺稿)』
  • 『동각잡기(東閣雜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파극담(靑坡劇談)』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백호집(白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학포집(學圃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