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朴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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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9년(명종4)~1606년(선조39) = 5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학자, 의병(義兵).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경상도 현풍(玄風) 출신이다. 감찰(監察)박순(朴純)의 손자이고, 맏딸이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의 손부(孫婦)가 되었다. 한강(寒岡)정구(鄭逑)가 그의 친구이자, 학문적 스승이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1)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부모가 작고하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응시하지 않았다. 낙천(洛川)배신(裴紳)에게 수학하였으나,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제자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과 깊이 사귀었기 때문에 남명조식의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행(才行)이 뛰어나서 광해군(光海君)의 사부(師父)로 추천되었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사포서(司圃署)사포(司圃)에 임명되었고, 공조좌랑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정인홍·김면 등과 함께 경상도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그 공으로 공조정랑에 임명되었다. 마침 경상우도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로 새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의 참모가 되어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1596년(선조29)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臺諫)에서 이순신(李舜臣)이 후퇴하는 왜적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탄핵하자, 그도 “이순신을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이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자, 그 막부(幕府)에 들어갔다. 이원익이 그를 청송(靑松)의 ‘주왕산성 대장(周王山城大將)’으로 임명하여 청송·안동 지역을 방어하게 하였다. 그때 시정(時政)의 폐단을 기록한 ‘시폐소(時弊疏) 16조(條)’를 선조(宣祖)에게 올렸는데, 그 한 조목에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죄에 얽어 넣은 자는 정철(鄭澈)이고, 배후 조종자는 성혼(成渾)이라고 주장하였다. 서인(西人)들은 이것이 정인홍이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자, 동인(東人)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1601년(선조34)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었고, 다시 공조정랑을 거쳐서, 1603년(선조36) 군자감(軍資監)첨정(僉正)이 되었다. 그를 좋아하지 않던 자가 당로자(當路者)가 되어 때때로 그를 모욕하자, 벼슬을 버리고 청송으로 돌아가서 주왕산(周王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뒤 영천군수(永川郡守)·익산군수(益山郡守)와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청송부사(靑松府使)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6년(선조39) 10월 주왕산 아래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저서로는 『대암집(大菴集)』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관군이 무너져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는데, 합천(陜川)의 정인홍, 현풍의 곽재우(郭再祐), 고령(高靈)의 김면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막았다. 전 현감(縣監)박성(朴惺)도 정인홍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여러 고을의 사민(士民)에게 통문을 보내어, 자원하는 자를 의병으로 뽑았다. 정인홍은 고령에서 의병을 모았고, 김면은 거창(居昌)에서 군사를 모았는데, 박성(朴惺)을 시켜 4~5일 동안에 군사 2천여 명을 모았다. 마침 경상우도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김성일이 정랑박성을 군량미를 모우는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으로 삼았다. 그때 진주성(晉州城)이 왜적에게 함락되려고 하자, 김성일은 박성을 전라도로 보내어 호남좌· 우도(湖南左右道) 의병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실패하자, 김성일은 다시 의병장 곽재우를 보내어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학봉(鶴峯)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리자 막객(幕客)이 모두 피하였으나, 박성은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다. 김성일은 병이 위독해지자, 박성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신의를 고마워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서 왜구가 다시 쳐들어오자, 박성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월천(月川)조목(趙穆)에게 가서 의병대장이 되기를 청하였다. 마침 체찰사이원익이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서 왜적을 방어하게 되었으므로, 그 막부(幕府)에 들어갔다. 이원익은 박성을 청송의 ‘주왕산성 대장’으로 삼아서 안동·청송 지역의 방어를 맡겼다. 이때 체찰사이원익은 박성에게 예우(禮遇)를 극진히 하여, 그에게 말할 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칭하였다고 한다.

성품과 일화

박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버지가 작고하고 나서는 과거(科擧)에 뜻을 버리고 학업에 전심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그때 수우당(守愚堂)최영경·한강정구·동강(東岡)김우옹(金宇顒)·송암(松庵)김면·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과 같은 학자들과 왕래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과 서로 만나면 학문을 토론하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내암(萊菴)정인홍과 특별히 친했는데, 정인홍이 조식 선생의 『남명집(南冥集)』 발문(跋文)을 쓰면서 퇴계(退溪)이황(李滉)을 헐뜯자, 박성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선정(先正)을 모욕하고서 군자(君子)가 될 자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지어 변론하였다. 이에 정인홍이 답하기를, “각자 소신을 지킬 터이니, 어지럽게 시비를 다툴 것이 없다.” 하였으므로, 결국 서로 절교하였다.

만년에는 『논어(論語)』를 매우 좋아하여 거처하는 서당(書堂)의 편액(扁額)을 ‘학안재(學顔齋)’라 붙였다. 또한 동쪽 방을 ‘사물(四勿)’이라 하고 서쪽 방을 ‘박약(博約)’이라 하였으며,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글을 배우겠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소학(小學)』을 읽도록 하며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려면 이 글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박성은 자기 학문을 중시하여 말하기를, “학문이 자기 기질(氣質)을 변화하는 데에 이르러야 학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질이 편벽되고 비루하므로 바로 잡아서 넓고 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스스로 자기 호(號)를 ‘대암(大菴)’이라고 지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송림(松林)의 언덕에 있는데,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대암집(大菴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순암집(順菴集)』
  • 『여헌집(旅軒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백호전서(白湖全書)』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