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희(權景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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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1년(문종1)∼1497년(연산군3) = 47세]. 조선 초기 성종~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번(子繁)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권질(權耋)의 아들이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이승손(李承孫)의 외손자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78년(성종9)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황해도관찰사의 좌막(佐幕)으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 · 병조의 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1491년(성종22)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그러나 1492년(성종23) 형 권경우(權景祐)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람을 시켜서 부당하게 상소하다가 발각되어 파직된 다음 홍천(洪川)에 부처(付處)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494년(성종25)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전직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1) 예조 참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사헌부의 장관이 되자 조정의 기강은 바로잡혔으나 연산군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그런데도 춘추관(春秋館)을 거쳐 예조 참판을 지냈고, 이때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496년(연산군2) 한성부우윤 · 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마침내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그해 하정사(賀正使)로서 중국에 가서, 명(明)나라의 예악(禮樂) 문물(文物)을 보고 돌아왔는데, 직접 중국의 문물을 보고 얻은 소득이 많았다고 한다. 1497년(연산군3) 2월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47세였다. 성종 때 권경희의 처가가 서얼(庶孼) 출신이라고 문제가 되었으나, 성종은 이것을 무시하고 그를 높은 벼슬에 임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지평(砥平) 북쪽 파고암리(破鼓巖里)에 있고,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첫째 부인은 경주김씨(慶州金氏)로 김치운(金致運)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이수봉(李秀蓬)의 딸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노주집(老洲集)』
  • 『사가집(四佳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수곡집(壽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