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朴盛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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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11년(숙종 37)~1779년(정조 3) = 69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다. 자는 공무(公茂)이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아버지는 박사한(朴師漢)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창협(金昌恊)의 딸이다. 만기(萬基)박세성(朴世城)의 후손이다.

영조·정조 시대 활동

1743년(영조 19) 윤 4월 알성시(謁聖試文)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46년(영조 22) 8월 설서(說書)가 되었고, 1747년(영조 23) 9월 다시 설서가 되었으며, 1748년(영조 24) 8월 정언(正言)이 되었다. 1749년(영조 25) 3월 다시 정언이 되었는데, 차대(次對)할 때 임금에게 주달(奏達)한 말의 기록을 고치려 하다가 그 해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 뒤 복관되어 1751년(영조 27) 6월 사서(司書)가 되었고, 1754년(영조 30) 12월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1755년(영조 31) 4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해 5월 삼사(三司)의 망(望)에서 삭간(削刊)되었다. 1763년(영조 39) 9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그 해 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다가 며칠 만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764년(영조 40) 5월 교리(校理)가 되고,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하였으며 8월 수찬(修撰)이 되었다. 1765년(영조 41) 1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고, 6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10월에 대사간이 되었다. 1768년(영조 44) 3월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1월 승지가 되었다. 12월에 또 다시 대사간이 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1769년(영조 45) 1월 파직되었다. 1773년(영조 49) 1월 대사간이 되었고, 1775년(영조 51) 11월 다시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대사간에 재직시 이담(李潭)을 논핵(論劾)하다가 주륙(誅戮)을 당한 남강로(南絳老)의 신원(伸寃)과 그 복작(復爵)을 상소하여 청하다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1776년(영조 52) 1월 영조의 명에 따라 석방되었다.

1777년(정조 1)에 대사간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1778년(정조 2)1월에는 승지가 되었다. 1779년(정조 3)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9세이다. 저서로는 『연설가관(筵說可觀)』이 있다.

시호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준(李焌)의 딸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