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傳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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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정족사고를 관리하던 강화도의 절.

개설

전등사(傳燈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으며, 고려시대까지 진종사로 불리다가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신의왕후의 위판과 영정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현종대에 정족산성을 수축하고 사고를 건립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전등사를 사고 수호 사찰로 지정하였다. 이후에 총섭 1인을 두고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병인양요 당시 사고의 서적 일부가 약탈된 후 『조선왕조실록』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조선전기

강화도 정족산에 소재한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정족사고(鼎足史庫)를 수호한 사찰로 유명하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의하면, 이 사찰은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阿道) 화상(和尙)이 창건하여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강화도는 백제가 다스리던 영토였고 백제에는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1366년(고려 공민왕 15)에 제작된 향로에 ‘진종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전등사 이전의 사찰 이름이 진종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전등사라는 사명이 언제부터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사찰 측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玉燈)을 시주했기 때문에 사명을 전등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공민왕 때 제작된 향로에 진종사라고 표시한 것과 시대적으로 배치된다. 충렬왕이 공민왕보다 재위 시기가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전기의 지리지에는 신라시대 산성으로 여겨지는 삼랑산성이 있는 정족산을 전등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초기까지 전등산으로 불리던 산 이름이 언제부턴가 정족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등사라는 명칭은 산명(山名)이 바뀌면서 사명(寺名)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 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의 위판(位板)과 영정(影幀)을 전등사에 보관하기도 했다. 당시 예조(禮曹) 참의(參義)이해수(李海壽)가 전등사의 지세가 편안하다고 판단하고 담을 수축하여 봉안하였던 것이다(『선조실록』 29년 2월 26일). 그러나 위판과 영정은 계속되는 전란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권희(權憘)가 강화부사로 재직할 때 살펴보니 위판이 여러 차례 적의 손을 거쳐 훼손되고 흙속에 밟혔다고 증언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위판을 신의왕후를 모신 제릉(齊陵) 곁에 묻었다(『선조실록』 32년 9월 3일).

그 후 전등사는 1605년(선조 38)에 큰 불이 나서 전각의 절반가량이 전소되었고, 1614년(광해군 6) 12월에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도 모두 탔다. 이듬해 4월에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柳淰)이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璿源閣)과 장사각(藏史閣)을 지어 왕실세보와 문적(文績) 및 역대 조종(祖宗)의 실록을 보관할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1660년(현종 1)에 정족산에 산성이 수축되고 또 사고(史庫)를 건립하여 실록을 보관하면서 전등사는 사고 수호 사찰이 되었다(『현종실록』 1년 11월 8일).

사고를 수호하는 사찰이 된 후 전등사에는 주지급인 총섭(摠攝) 1인과 여러 승려들이 있었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정조대에는 전등사를 지원할 방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즉 가분모(加分耗)를 보관할 창고를 지어 거기서 나는 모곡(耗穀)으로 승려들을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정조실록』 8년 8월 9일). 이러한 조정의 지원을 받아 헌종과 철종대를 지나면서 전등사는 법당 및 요사의 벽이 새롭게 도배되고, 시왕전이 수리되었으며 대웅전과 대조루가 중건되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해 정족산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되었다. 그 후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 실록 및 서적들은 서울로 가져가 춘추관(春秋館)의 관장 하에 관리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 보관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정족사고본을 보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등사는 30본산(本山)으로 지정되어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개 사찰을 관할하였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 Ⅱ』,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5.
  • 韓國學文獻硏究所 編, 『傳燈本末寺誌』, 亞世亞文化社, 1978.
  • 윤렬수, 「전등사 소장 천계칠년명 목각업경대」, 『동악미술사학』3, 2002.
  • 최선일·김형우 편저, 「강화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인천학연구총서』11,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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