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증(李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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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7년(세종 9)~1464년(세조 10) = 38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2왕자. 봉작(封爵)은 계양군(桂陽君)이고, 자는 현지(顯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김신빈(金愼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김신빈이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첫째인데, 동복아우는 의창군(義昌君)이강(李玒),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익현군(翼峴君)이관(李璭), 영해군(寧海君)이당(李瑭), 담양군(潭陽君)이거(李璖)다. 좌의정한확(韓確)의 사위이고 인수대비(仁粹大妃)의 형부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27년(세종 9) 8월 12일 세종과 궁인(宮人) 김씨(金氏) 사이에 태어났다. 세종이 30대 전후에 사랑한 궁녀는 김신빈(金愼嬪)과 강영빈(姜令嬪)인데, 김신빈은 그 뒤에도 계속 사랑하여 첫째아들 계양군에서부터 여섯째아들 담양군까지 잇달아 6형제를 낳았으므로 후궁 가운데 김신빈을 가장 사랑하였던 것 같다. 1434년(세종 16) 계양군에 봉해졌다. 1437년(세종 19) 12월 나이 11세 때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한확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부인 한씨는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에 봉해졌다. 한확은 조선 초기에 조선과 중국에서 가장 세도가로서 행세하였는데, 그 누나가 명(明)나라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의 제 3황후였고, 또 그 누이가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과 명나라에 어려운 외교상의 문제가 있으면, 한확이 사신으로 갔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禪位)하여, 명나라에 세종의 책봉(冊封)을 요청할 때 한확이 고명(誥命) 사신(使臣)으로 갔다. 한확의 자녀 3남 6녀 중에서 둘째딸이 계양군과 혼인하여 세종의 며느리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이 되었고, 막내딸이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과 혼인하여 세조의 며느리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세종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계양군이증에게 명하여 그 형 화의군(和義君)이영(李瓔)과 함께 매일 정음청(正音廳)에 나가서 서리를 감독하여 집현전 학사(學士)들의 연구 작업을 도와주고, 그 원리를 배우게 하였다.[『해동잡록(海東雜錄)』 4권 「본조(本朝) 성삼문」]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후에 어머니 김신빈은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서 여승이 되었다.

단종 시대의 활동

1452년(단종 즉위)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서 단종을 책봉하고 고명(誥命)을 보내준 것에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자, 계양군이증은 양녕대군(讓寧大君),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 진남군(鎭南君)이종생(李終生) 등과 함께 수양대군을 전별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이를 적극 도왔다. 1454년(단종 2) 1월 수양대군과 다른 종친들과 함께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데 참여하고,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단종의 왕비로 간택하였다. 그해 5월 영의정수양대군이 4공신(功臣) 을 거느리고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단종에게 풍정(豊呈)을 올릴 때 참석하였다. 그해 8월 계양군이증은 세종의 부마 영천위(鈴川尉)윤사로(尹師路)와 함께 수양대군에게,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알렸다. 이듬해인 1455년(단종 3) 5월 계양군이증은 파평위(坡平尉)윤암(尹巖)과 함께, 금성대군 · 화의군과 양혜빈(楊惠嬪) · 박상궁(朴尙宮) 등이 음모를 모의하고 있다고 고발하여, 이른바 <양혜빈(楊惠嬪)의 옥사>가 일어났다. 양혜빈은 청풍(淸風)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고, 금성대군과 화의군은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양혜빈이 낳은 아들 한남군(漢南君) · 수춘군(壽春君) · 영풍군(永豊君)의 3형제는 모두 수양대군을 반대하다가 귀양갔으나, 김신빈이 낳은 계양군 등 6형제는 수양대군을 지지하였다. 1455년(세조 1) 윤6월 단종이 양위하여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이해 9월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수충 위사 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계양군이 되었다.

세조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 1) 윤6월 단종이 양위하여 세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8월 세조가 종친 중에서 계양군이증 · 영천위윤사로와 백관 중에서 신숙주(申叔舟) · 권남(權擥) · 한명회(韓明澮) 등을 “고굉 제신(股肱諸臣)”이라 일컫고 이들을 공신(功臣)으로 책봉하도록 명하여, 이해 9월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수충 위사 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계양군이 되었다.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다가 죽은 양혜빈 등의 재산과 노비를 몰수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 등의 가산을 적몰하여, 이를 종친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계양군이증은 금성대군의 저택과 전토를 두 차례나 하사받았고[『세조실록』세조 1년 월 27일, 세조 2년 2월 18일] 이해 9월 역적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빌개(彌飛乙介) · 딸 계금(繼今)을 하사받았다. 또 1457년(세조 3) 2월 적몰(籍沒)된 역적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이해 3월 성승(成勝)의 고양(高陽) 전지를 하사받았다. 이해 8월 세조가 계양군이증에게 서대(犀帶) 1벌을 내려 주었다. 서대는 중국에서 코뿔소뿔로 만든 관대인데, 당시 조정의 종2품 이상 대신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반드시 사고 싶어 하던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관료가 서대를 매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조선의 관리는 배신(陪臣)이므로 중국의 관료보다 2품을 낮추므로, 서대를 착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에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順興府使)이보흠(李甫欽)과 손을 잡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는데,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이것을 고변(告變)하고 그 증거로 명주띠를 바치자, 세조는 계양군이증과 한명회에게 명하여 이것을 자세히 따져서 심문하게 하였다. 그해 10월 단종 복위를 도모한 금성대군의 죄를 논하고 그를 유배지에서 사사(賜死)하였다. 또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도 처형하였다.

세조 시대 계양군이증은 세조가 베푸는 연회에 초청되었고, 관사(觀射)에 입시(入侍)하였으며, 궁중의 음식을 시식(侍食)하였다. 또 세조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을 대신하여 계양군이증을 보내어 관청과 대신들에게 자주 전교(傳敎)하였다. 1457년(세조 3) 4월 명나라로 사신가는 내시부(內侍府)판사(判事)전균(田畇)을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할 때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친동생 의창군이강과 함께 참석하였다. 1464년(세조 10) 계양군이증이 병이 들자, 세조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끝내 효험(効驗)을 보지 못하고, 8월 16일에 졸하였는데, 향년이 34세였다.[『세조실록』세조 10년 8월 16일「계양군 이증 졸기」]

성품과 일화

1458년(세조 4) 6월 세조가 계양군이증을 좌익 1등 공신으로 책훈할 때 내린 교서(敎書)를 보면, “경사(經史)의 글에 널리 통하고 효우(孝友)의 행실에 돈독(敦篤)하고 충성스러운 마음[素心]뿐이기 때문에 충절(忠節)을 보였다.” 라고 하였다. 또 『세조실록』「계양군 이증 졸기」를 보면,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읽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질이 단아(端雅)하고, 용의(容儀)가 아름답고, 담화(談話)를 잘 하였으며,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 겸손하고 공경(恭敬)하였다. 일찍이 자기가 존귀하고 세력이 있다는 것을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주색(酒色)으로 인하여 졸(卒)하였다.”고 하였다. 1463년(세조 9) 5월 4일 익현군이관이 졸하였을 때 세조가 “이것은 모두 계양군의 허물이다. 의창군이 술 때문에 죽었는데, 익현군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내가 매우 슬프다.”고 하였는데[『세조실록』세조 9년 5월 4일 「익현군 이관 졸기」] 김신빈의 소생 계양군을 비롯하여 의창군⋅익현군이 모두 술병으로 일찍 사망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묘완산(妙宛山)에 있다.

부인인 정선군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로서 영의정한확의 딸이고 인수대비의 언니이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이예(李澧)는 영원정(寧原正)이었다가 습군(襲君)하여 영원군(寧原君)이 되었다. 차남 이숙(李潚)은 초명이 이융(李瀜)인데, 강양정(江陽正)이었다가 강양군(江陽君)이 되었고, 담양군이거의 양자가 되었다. 3남 이식(李湜)은 부림정(富林正)이었다가 부림군(富林君)이 되었다. 장녀는 안계송(安繼宋)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정경조(鄭敬祖)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한금(韓嶔)의 처가 되었다. 서출로 1남 1녀가 있는데, 1자는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이고, 1녀는 정종선(鄭從善)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가집(四佳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동문선(東文選)』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