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면(尹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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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 및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했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윤처성(尹處誠)이며,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판사(判事)를 지낸 박침(朴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지의정(參知議政)을 지낸 윤사수(尹思修)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동지밀직(同知密直)을 지낸 윤방안(尹邦晏)이다. 주로 세종 때에 간관(諫官)으로 활동하였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2년(세종 14)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442년(세종 24)에 사간원 좌정언에 임명되어 인사나 종친의 행실 등에 관련하여 간쟁하였다.(『세종실록』 24년 12월 19일),(『세종실록』 25년 2월 13일),(『세종실록』 25년 3월 4일),(『세종실록』 25년 9월 11일),(『세종실록』 25년 9월 27일),(『세종실록』 25년 10월 12일),(『세종실록』 25년 11월 10일) 함길도의 축성 공사를 멈춰야 한다고 아뢸 때에는 한 자리에서 3번이나 간언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5년 8월 7일) 또 민생을 걱정하여 민간의 저전(楮田)·칠림(漆林)·죽림(竹林)·과원(菓園) 등에는 세금을 거두지 말 것을 청하거나, 전품(田品) 나누는 것을 미루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세종실록』 25년 11월 22일),(『세종실록』 25년 12월 17일)

문종(文宗) 때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어 기강이 문란한 관리들을 탄핵하는 역할을 주로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문종실록』 즉위년 12월 28일),(『문종실록』 즉위년 12월 29일),(『문종실록』 1년 1월 26일) 뿐만 아니라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집을 짓는 데에 인가 30여 구를 부순다고 하여 이에 대해서도 임금에게 직접 간언하기도 했다.(『문종실록』 1년 4월 1일) 세조(世祖) 때에 <단종(端宗)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세조실록』 4년 2월 2일) 성종(成宗) 때에 세조 때의 연좌죄로 서반(西班) 벼슬만을 제수받았으나 왕의 명으로 동반(東班) 벼슬을 할 수 있게 되었다.(『성종실록』 2년 10월 7일)

성품과 일화

윤면(尹沔)은 세종 및 문종 때 매우 활발하게 간쟁 활동을 하였다. 특히 임금의 뜻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할 때에도 거침이 없었으며, 종친이나 권세가의 전횡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묘소와 후손

부인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이효례(李孝禮)의 딸로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윤훤(尹萱)으로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홍천현감(洪川縣監)을 지낸 김모(金模)의 딸 연안 김씨(延安金氏)와 결혼했다. 2남은 윤진(尹秦)이며, 3남 윤화(尹華)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박문규(朴文規)의 딸과 결혼하였다. 1녀는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심주(沈胄)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주부(主簿)에 오른 조익확(趙益確)과 결혼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