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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6 기준 최신판



개별 민가에서 차출된 요역의 역부.

개설

연군(烟軍)은 개별 민가에서 차출된 요역의 역부(役夫)를 의미하였다. 연군은 연호군(烟戶軍, 煙戶軍)·연화군(烟火軍)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초기에는 요역제가 정립되면서 요역 징발의 기준을 개별 민가가 소유한 토지 면적에 두었다. 이에 따라 전결지군(田結之軍)·전부지군(田賦之軍)이라는 표현도 썼다. 17세기 이후 대동법과 잡역세의 제도가 시행되면서, 수취제도에서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역역(力役)으로서의 요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연군 혹은 연호군을 써서 관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방식은 점차 줄어들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 성종대에 마련된 역민식(役民式)과 『경국대전』의 요역 규정에 따르면, 전지(田地) 8결마다 역부 1명을 차출하되 사역 기간은 연간 6일을 넘기지 않았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이로써 개별 민가가 보유한 노동력보다는 전결(田結), 곧 사유지 면적을 요역 징발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렇게 징발된 요역의 역부는 연군으로 지칭되었다.

예컨대 1485년(성종 16) 황해도 재령의 전탄(箭灘)에 천방(川防)의 역사를 일으켰다(『성종실록』 16년 9월 22일). 이때 황해도의 모든 전지에서 5결마다 연군 1명을 징발하여 20일간 일하도록 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도성 축성역에 삼남의 민가에서 연군을 징발하면서, 전라·경상도에서는 20결당 연군 1명을 내고 충청도에서는 25결에 연군 1명을 내어 1개월씩 사역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4일).

요역 농민인 연군을 차출할 때 지방관은 관내 주민을 번갈아 뽑아 쓰는 방식을 취하였다. 군현민의 연명부를 바둑판 무늬의 정간책(井間冊)의 형식으로 작성함으로써 공평한 차역(差役)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정간(井間)에 따라 차례로 돌려 가며 징발[輪回差役]함으로써 공평하게 사역하는 방식이었다.

도성 내의 요역인 방역(坊役)에서는, 전결이 아니라 호적상의 집 가호(家戶)에서 역부를 징발하는 방법이 적용되었다. 조선초기 세종대에는 도성 내 집의 칸수[間數]를 헤아려서 요역 노동 징발의 기준으로 삼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뒤 어느 때부터인가 집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집마다 1명씩 역부를 내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조선후기 대동법이 시행되고 잡역세의 제도가 확산되면서 역역으로서의 요역이 수취제도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도 요역 농민인 연군은 토목 공사 등에 단기간 징발될 수 있었다. 예컨대 축성역이나 제언(堤堰)의 수축, 수해의 복구, 석물(石物)의 운송, 관아 시설의 수축 등의 역사에서 그러한 사정을 볼 수 있었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山陵役)에서는 8,000~9,000명의 연군을 징발하여 1개월씩 사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산릉역에서 승군(僧軍)이 징발되고, 모군(募軍)이 고용되면서 연군 징발 규모는 축소되었다.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산릉역에서는 2,100명의 연군이 1개월씩 징발되었으며, 별도로 경상도의 연군 1,100명은 연군가포(烟軍價布)를 대납하도록 조치하였다. 나머지는 승군과 수군(水軍)의 부역 노동 및 모군의 고용 노동으로 수행하였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산릉역에 연군을 징발하지 않았다. 다만 연군은 수리 시설을 축조하는 축제역(築堤役)에 많이 투입되었다. 제언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고, 농업 생산 분야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요 시설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연군이 필요하였다. 성곽을 축조하는 축성역(築城役)에도 연군이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성곽이 있는 곳에서는 수시로 수축의 역사가 필요하였다. 많은 인원의 장기간 사역이 필요한 역사라는 점, 더욱이 막중한 관방(關防) 시설에 관계된다는 점 등의 조건 때문에 다른 어떤 분야의 요역 노동보다도 끈질기게 남을 수 있었다. 축제역·축성역 등의 분야에서 요역 노동을 징발하는 사례는 18세기 이후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17세기 이후 관의 역사에 징발된 연군은, 대체로 단기간의 부역 노동에 동원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17세기 후반의 연군들은 역량을 지급받는 경우가 많았다. 역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징발하는 ‘급량부역(給糧赴役)’의 방식은 차츰 일반화되고 관례화되었다. 연군을 차출하더라도 직접 징발하기보다는 대전(代錢)·방고전(防雇錢) 등의 이름으로 대가를 거두는 일도 많았다.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로는 지방관아에서도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역역 징발이 점차 사라지고 잡역세를 거두어서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였다.

변천

17세기 이후 요역제는 전반적으로 현물로 납부하는[物納稅化] 추이를 보였다. 이에 따라 농민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던 요역 노동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이 시기에 남아 있던 요역은 이미 국가 부세 체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요컨대 중앙 및 지방의 각종 역사에서 연군을 징발하기에는 어렵게 된 것이다. 노동력 수급 체계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변화에 직면하자, 당시 지배층 관료들은 크게 2가지 대응 방식을 모색하였다. 하나는 모립제(募立制)를 도입해서 고용 노동력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부역 노동 징발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노동력 수급 방식의 질적 전환을 모색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부역 노동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하려는 방식이었다. 승역을 강화하는 일이 그러한 예에 속하였다.

참고문헌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윤용출,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지역과 역사』 제21호, 2007.
  • 강제훈, 「15세기 경기지역의 요역제」,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