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坊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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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기 서울의 오부 방민에게 부과된 요역.

내용

중앙집권적 중세 국가의 왕도는 지배 집단의 집중 거주지이자 권력 유지와 소비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비농업적 기능,비생산적 기능이 집중된 곳이었다. 따라서 농촌 사회를 기준으로 한 부세제도 운영의 원칙이 왕도의 주민에게 그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 신분적·직업적 기반이 농촌 사회와 다르다는 전제 하에서 도시민에게 균부균역(均賦均役)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 방역(坊役)이었다.

방역의 요역노동이 동원된 종목은 왕궁 수리, 축성역, 차비군(差備軍)의 역, 장빙역(藏氷役), 하천 공사, 좌경역(坐更役) 등이었다. 방역의 사역 일수는 연간 6일 이내로 추정되며, 점차 줄어서 17세기 이후는 연간 1~2일 정도 단기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방역의 실무는 동임(洞任)·계임(契任)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방역은 부정기적이고 부정량적이었으며, 또 거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실정이어서 사실상 서울민 모두에게 일률적인 균역(均役)이 이루어지기 곤란하였다. 사대부(士大夫)를 칭하여 역에서 면제되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방역이 갖는 기본 모순은 무엇보다도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는 오부 방민을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노동에 투입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중세도시의 상품유통경제가 확대되고 종래와 다른 생산적 기능이 강화되어 갈 때 더욱 심화되었다. 도시 노동력의 무상징발이 불가능해지는 실정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부 방민의 방역은 부분적으로 금납화되었으며, 방역노동에 참여할 경우에는 대가를 지급받는 급가(給價)의 조치가 취해졌다. 나아가 방역의 여러 분야에서 전업적인 고용노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인계(貢人契)로서 방역을 전담하는 방역계(坊役契)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종래 방역으로 수행되던 하역운송업 등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역계의 형성과 방역의 금납화는 이 시기 서울의 도시적 기반이 증대한 노동력을 수용할 정도의 생산성을 확보하며 상공업 도시의 기능도 점차 증대시켜 가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용례

掌令李秞啓曰 五部坊役之不均 其來久矣 內司及諸宮家奴婢 則不差役 砲手率丁不差役 坊民之謀避坊役者 冒稱此類 中間落漏者 比比有之 現存坊民 偏受其苦 請令漢城府 從長變通 俾無不均之弊 上從之 (『현종개수실록』 5년 11월 13일)

참고문헌

  • 김동철, 「18세기 坊役制의 변동과 馬契의 성립 및 都賈化 양상」, 『韓國文化硏究』 1, 1988.
  • 이지원, 「17~8世紀 서울의 坊役制 운영」, 『서울학연구』 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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