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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이후 삼국시대 촉의 장수 무안왕(武安王)관우(關羽)를 숭상하여 세운 사당.

개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군에 의해 관우의 사당이 소개되었다. 명나라 군인들은 관우를 ‘무의 성인’으로 추앙하였고, 상인들 역시 사업을 번창하게 해 주는 신으로 숭배했다. 조선후기에 관왕묘는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면서 한양, 성주, 안동, 전주, 남원, 고금도 등 전국에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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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

처음 한양에는 관왕묘가 두 곳에 있었다. 숭례문 밖에 있던 관왕묘는 한양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묘(南廟)라고 했고, 흥인지문 밖에 있던 관왕묘는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묘(東廟)라고 했다. 고종대에 들어서면서 한양의 혜화동에 북관왕묘인 북묘, 서문 밖 천연동에 숭의묘(崇義廟)라고도 하는 서묘를 만들어 총 4곳의 관왕묘가 운영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27일). 그러나 대한제국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훼철되어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있다.

동묘는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정전을 중심으로 전면 좌우측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정면에는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 밖에는 외삼문이 있으며 좌우로 관리사무소와 화장실이 있다.

정전의 평면 구성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본실을 중심으로 전면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실 건물이 하나의 건물로 결합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정면을 제외한 3면을 벽돌로 감싸 마감했는데 조선의 전통적인 건축 방식과는 다른 건축법이다. 동무와 서무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평면형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공포는 초익공을 사용했다.

변천

조선에 최초로 관왕묘가 만들어진 것은 1598년(선조 31)의 일이다(『선조실록』 1년 4월 25일).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유격(遊擊)진운홍(陳雲鴻)이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숭례문 밖에 머물렀다. 이때 후원(後園) 위에 있던 오래된 집을 이용해 관왕묘를 세우고 소상(小像)을 설치하면서 조선에 장인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남묘의 시초이다.

1599년에는 또 다른 관왕묘의 건립이 논의되었다(『선조실록』 32년 4월 29일). 이때 선조는 새로운 관왕묘를 흥인문 밖의 조산(造山) 근처에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경리(經理)였던 만세덕(萬世德)은 숭례문 밖에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선조는 명나라 원외랑(員外郞)유황상(劉黃裳)이 "조선은 도성 동편이 허하니 건물을 세우고 못을 깊이 파 지맥을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빌어서, 만약 관왕묘를 세운다면 동문 밖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 결과 관왕묘를 동대문 밖 영도교(永渡橋) 옆에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관왕묘 공사는 쉽게 진척되지 못하여 약 22개월 후인 1601년 8월에 가서야 일단락되었다.

1692년(숙종 18) 숙종은 시 2수를 지은 후 어필 목판을 내려 동묘와 남묘에 걸어 두도록 했다(『숙종실록』 18년 9월 15일). 1746년(영조 22)에는 영조가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현판을 써서 두 관왕묘에 걸도록 했다(『영조실록』 22년 8월 22일). 1785년(정조 9)에는 정조가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를 두 관왕묘에 세웠다(『정조실록』 9년 11월 15일). 고종대에는 북묘와 숭의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만들어졌고, 숭의묘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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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인 1908년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享祀釐正件]이 통과되면서 관왕묘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없어졌다. 기존의 조선 예절은 너무 번잡하여 근본을 잃게 되었으며 유신(維新)을 지향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실(帝室)에 관계되지 않는 제사는 궁내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 칙령의 요지였다. 이 칙령에 따라 숭의묘, 동묘, 남묘, 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가 폐지되었고, 숭의묘와 북묘는 국유로, 동묘, 남묘 및 지방 관왕묘는 해당 지방 관청으로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하도록 했다. 이후 서묘는 1909년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에 헐어버렸다. 현재는 흥인문 밖에 위치한 동묘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문화재관리국 편, 『한국의 고건축 26, 동묘의 건축』,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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