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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경기도 장단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조선이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장단현(長湍顯)은 개성부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군익도(軍翼道)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했을 때에는 양주도(楊州道)에 소속되었다. 곧이어 주변의 임진·임강과 합쳐 임진현으로 통합되었으며, 세조 때 진관(鎭管)체제로 개편될 때 개성진에 편성되었다.

세조 때 정희왕후(貞熹王后) 선조들의 장지(葬地)가 있다는 이유로 장단현으로 바뀌고 군으로 승격되었다. 개성이 유수부로 바뀌면서 개성부에 속했던 제진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계기로 도호부로 격상되어 비로소 진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방어영이 설립되었다가 옮겨졌고, 겸영장을 두었다.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총융청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고려시대 개성부에 예속되었던 장단현이 경기좌도(京畿左道)로 이속되었다. 1414년(태종 14) 임강(臨江)을 병합하여 장림(長臨)으로 고쳤다가, 곧이어 임강현을 분리시키는 대신 임진현(臨津縣)과 합쳐 임단현(臨湍縣)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418년(세종 즉위) 장단현으로 회복되었으며, 1455년(세조 1)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을 때 임진·임강과 더불어 양주도(楊州道)의 우익(右翼)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이듬해 임진·장단(長湍)·임강을 합하여 임진현으로 만들었다(『세조실록』 2년 7월 4일). 1457년에는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여러 도(道)의 중익(中翼)·좌익(左翼)·우익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을 때에는 임진의 이름으로 개성진(開城鎭)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458년(세조 4) 세조의 중궁(中宮), 즉 정희왕후 선조들의 장지가 있다는 이유로 ‘장단’이라 부르고 현령(縣令)을 임명하였다가, 다음 해 민호(民戶)가 상당히 많다며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드디어 개성부(開城府)경관(京官), 곧 유수부로 바뀌고 구례에 의해 절도사를 겸하여 부내(府內)의 병마(兵馬)만 관리하게 되었다. 이에 전에 소속했던 강화·풍덕(豐德)·삭녕(朔寧)·마전(麻田)·연천(漣川)·교동(喬桐)을 장단에 이속시키고 동시에 그를 도호부로 승격시켜 거진으로 만들었다(『예종실록』 1년 7월 1일). 이를 계기로 진관이 성립했으며, 이것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3품의 장단도호부사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였다. 그에 소속된 강화에서는 부사가, 풍덕·삭녕·마전에서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연천·교동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면서 지휘를 받았다. 대체로 개성진이 관할하던 진을 인수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앙에 올라가 왕의 검열을 받을 때는 오위(五衛)에 소속되었는데, 중위(中衛)였던 의흥위(義興衛)의 중부(中部)에 속하였다.

변천

장단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종2품의 병마방어사를 겸하였는데(『광해군일기』 15년 3월 12일), 이는 『속대전(續大典)』에도 수록되었다. 그러나 뒤에 파주로 옮겨 갔다. 아울러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전임으로 파견되는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였다. 즉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을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의 수령이 행사하던 군사 지휘권을 이양받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지 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1637년에 일단 혁파했다. 그 대신 병자호란 이후에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했는데, 『속대전』에 따르면 우영장(右營將)을 겸하는 것으로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도성의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1624년(인조 2) 총융청(摠戎廳)을 설치하여 경기도병마절도사를 대신해 경기도 병력을 거느리게 하면서 이에 속하게 했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이에 『속대전』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 따르면 총융외영의 우진영장(右鎭營將)을 겸했다. 뒤에는 후진영장(後鎭營將)을 맡는 것으로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장단·파주 및 남양·수원을 남북으로 나누어 각 두 영씩 돌아가면서 훈련시켰다. 하지만 수원이 총리영(摠理營)으로 승격되어 빠진 뒤에는 세 영을 돌아가면서 훈련시켰다. 1794년(정조 18) 장단의 마병(馬兵)별효사(別驍士)로 개칭하였다(『정조실록』 18년 4월 5일).

한편 진관에 속하였던 강화가 유수부로 승격되고, 교동에 수영(水營)이 설치되어 제외됨에 따라 소속 제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삭녕과 마전이 남아서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고, 연천만 현감이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

개항 이후 신식 군제로 개편하는 작업의 하나로 1883년(고종 20) 경기도 연해 지방에 있던 해방병포(海防兵砲)의 훈련을 통할할 목적으로 해방아문(海防衙門)을 설치해서 처음에는 수군을 통솔하였다. 다시 이듬해 총융청에 소속되었던 장단 등의 속오군(束伍軍)을 속하게 했다(『고종실록』 21년 9월 2일). 이윽고 총융청이 혁파되고 친군우영으로 바뀌자 겸장단진병마첨절제사친군우영전영장토포사로 고쳤다(『고종실록』 22년 12월 11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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