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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 소속의 정3품 관직.

개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유선(諭善)은 1402년(태종 2) 4월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태종은 양녕대군을 원자로 책봉하면서 원자요속(元子僚屬)을 두었는데, 요속 중에 좌·우유선(左·右諭善) 각 1명, 좌·우시학(左·右侍學) 각 1명, 좌·우동시학(左·右同侍學) 각 1명 등 총 6명이 있었다. 당시의 좌·우유선은 조서(趙敍)와 김시용(金時用), 좌·우시학은 이공의(李公義)와 이양명(李陽明), 좌·우동시학은 김훈(金訓)과 홍여방(洪汝方)이 맡았다. 요속의 선발 기준은 유신(儒臣)으로서 문행(文行)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원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즉, 태종 때의 유선은 원자 교육을 담당하던 교육 관료의 일종이었다.

태종 이후 원자 교육은 보양청, 강학청에서 담당하게 되었는데, 보양청이나 강학청에는 유선이란 직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태종 이후로 경종 때까지 유선은 원자 또는 세손 교육과 관련하여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선은 영조 때에 이르러 세손의 교육 관료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영조는 1735년(영조 11)에 원자인 장헌세자의 교육을 위해 유선관(諭善官)이라는 이름으로, 심육과 어유봉을 임명한 바 있다. 이후 1750년(영조 26)에 의소세손을 위해 강서원을 설치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세손사(世孫師)와 세손부(世孫傅)를 두었다. 세손의 교육을 강화하고 아울러 강서원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영조는 1759년 세손 정조를 위해 강서원을 설치하면서 태종 때의 고사를 인용하여 좌·우유선을 더 두었는데, 좌유선에 김양택(金陽澤), 우유선에 서지수(徐志修)를 임명했다. 영조는 좌·우유선의 품계를 정3품에서 종2품까지로 하였다. 이에 따라 세손강서원은 이전의 종4품 익선(翊善)을 우두머리로 하던 아문에서 정3품 유선을 수반으로 하는 아문으로 격상되었다. 이 같은 세손시강원의 체제는 거의 그대로 『대전통편』에 수록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의 세손은 장차 왕이 될 신분이므로 세손의 제왕 교육 목표 역시 세손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선까지도 개발·육성하는 데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실천 양쪽에서 뛰어난 학자를 유선으로 임명하고 유선을 세손강서원의 전임 관료 중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로써 어린 세손의 선에 대한 학문적 기초와 실천적 토대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변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세손시강원과 보양청은 모두 시강원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갑오개혁 때에 유선은 공식적으로는 세자시강원에 소속된 관원이었다. 이때 정원이 1명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1903년(광무 7)에 황태손강서원(皇太孫講書院)이 설치됨으로써 강서원은 시강원에서 독립하였다. 이는 황제 체제에 맞추어 조선시대의 세손시강원을 격상시켜 독립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황태손강서원에는 유선이란 직명이 사라지고 그 대신 일강관(日講官) 2명, 유덕(諭德)과 부유덕(副諭德) 각 1명, 찬독(贊讀) 2명이 배속되었다. 이에 따라 유선은 공식적으로 1903년 황태손강서원이 설치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
  •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 『열성진강책목록(列聖進講冊目錄)』
  • 『정조강서원일기(正祖講書院日記)』
  • 『시강원지(侍講院志)』
  • 『열성조계강책자차제(列聖朝繼講冊子次第)』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 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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