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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판



조선시대 전기에 승과를 치르지 않은 승려에게 주던 문서.

개설

승과(僧科)가 시행되던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출가를 하였으나 아직 승과를 치르지 않고 수행중인 승려를 참학(參學)이라 불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084년(고려 선종 1)에 구산문(九山門)의 참학승도(參學僧徒)가 진사(進士)의 예에 따라 3년에 한 번 선시(選試)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참학은 도첩을 받고 출가하였으나 아직 승과를 보지 않은 승려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참학입선첩(參學入選帖)은 승과를 치르지 않은 참학에게 내려주던 문서로 추정된다.

내용 및 특징

참학은 『고려사』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금석문에서도 확인된다. 1188년(고려 명종 18)에 건립된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의 뒷면에는 사법제자(嗣法弟子) 명단이 중대사(重大師)-입선(入選)-참학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1295년(고려 충렬왕 21)에 세워진 인각사 보각국존정조탑비(麟角寺 普覺國尊靜照塔碑)의 뒷면에도 대선사(大禪師)-선사(禪師)-수좌(首座)-산림(山林)-삼중(三重)-대선(大選)-입선-참학의 순서로 문도가 나열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기인 1393년(태조 2)에 세워진 억정사 대지국사비(億政寺 大智國師碑)와, 그 이듬해인 1394년(태조 3)에 건립된 청룡사 보각국사비(靑龍寺 普覺國師碑)에도 참학이 등장한다. 대지국사비에는 대선사-선사-중덕(中德)-대선-운수(雲水)-참학의 순으로, 보각국사비에는 대선사-선사-대선-운수-참학의 순서로 문도가 나열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까지 ‘입선’은 승과 본 시험에 앞서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실시한 일종의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 또는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용어였다. 이로 미루어 참학은 사미(沙彌) 단계를 지나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선과(禪科)에 참여하지 못한 승려에게 참학입선첩을 발급했다(『명종실록』 7년 4월 28일). 한편 명종대에 왕실 원당(願堂)의 주지(住持)와 지음(持音)은 해당 원당을 비롯해 인근 사찰까지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명종실록』 6년 8월 13일 4번째기사]. 이때 주지에는 반드시 승과를 거친 승려를 임명했으나, 지음은 참학승 중에서 선정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전기의 참학승은 사미 단계는 거쳤으며, 승과를 치르지는 않았으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출가를 인정받은 승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552년(명종 7)에 주지는 선과에 합격한 사람으로, 지음은 참학승으로 임명하면 자연히 잡승(雜僧)이 없어질 것이라며, 고례(古例) 즉 이전 사례에 의거해 참학입선첩을 발급하라는 왕명이 있었다(『명종실록』 7년 4월 28일). 이 조처는 참학입선첩을 발급하여 승과를 보지 않은 참학승에게 지음이라는 승직(僧職)을 주기 위한 절차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음이 될 수 있는 참학승과 일반 승려, 잡승(雜僧)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현전하는 자료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下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 정병삼, 「일연선사비의 복원과 고려 승려 비문의 문도 구성」, 『한국사연구』13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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