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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최경회|한글표제=최경회|한자표제=崔慶會|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 사회운동가/의병|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집필자=최양규|자= 선우(善遇) |호=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봉작=|시호= 충의(忠毅)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32년(중종 27)|사망=1593년(선조 26)|본관=해주(海州)|주거지= 전라도 화순(和順) |묘소소재지=|증조부= 최혼(崔渾) |조부= 최윤범(崔尹範) |부= 최천부(崔天符) |모_외조=순창임씨(淳昌林氏): 임철공(林鐵恭)의 딸|형제=(형)최경운(崔慶雲), 최경장(崔慶長)|처_장인=나주김씨(羅州金氏): 김원(金遠)의 딸|자녀=(1자)최홍기(崔弘器)|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627|실록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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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최경회|한글표제=최경회|한자표제=崔慶會|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 사회운동가/의병|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집필자=최양규|자= 선우(善遇) |호=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봉작=|시호= 충의(忠毅)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32년(중종 27)|사망=1593년(선조 26)|본관=해주(海州)|주거지= 전라도 화순(和順) |묘소소재지=|증조부= 최혼(崔渾) |조부= 최윤범(崔尹範) |부= 최천부(崔天符) |모_외조=순창임씨(淳昌林氏): 임철공(林鐵恭)의 딸|형제=(형)최경운(崔慶雲), 최경장(崔慶長)|처_장인=나주김씨(羅州金氏): 김원(金遠)의 딸|자녀=(1자)최홍기(崔弘器)|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627|실록연계=}}
  
 
=='''총론'''==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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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왜군들이 여러 지역의 군사를 모아서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성일(金誠一)이 호남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전라좌도 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우도 의병장 임계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선조수정실록』 참조.) 최경회가 전라좌도 의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관찰사김성일은 최경회의 전라좌도 의병을 진주(晉州)의 살천창(薩川倉)에 주둔하게 하였다. 관찰사김성일은 진주성에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을 한꺼번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에게 진주성의 서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의령(宜寧)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진주성의 동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또 합천(陜川)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에게 북문으로 들어가고, 고성(固城) 의병장 조응도(趙凝道) 등에게 남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1592년(선조 25)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왜군들이 여러 지역의 군사를 모아서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성일(金誠一)이 호남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전라좌도 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우도 의병장 임계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선조수정실록』 참조.) 최경회가 전라좌도 의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관찰사김성일은 최경회의 전라좌도 의병을 진주(晉州)의 살천창(薩川倉)에 주둔하게 하였다. 관찰사김성일은 진주성에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을 한꺼번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에게 진주성의 서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의령(宜寧)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진주성의 동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또 합천(陜川)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에게 북문으로 들어가고, 고성(固城) 의병장 조응도(趙凝道) 등에게 남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감사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서 죽고, 왜군의 기세가 강하여 최경회 등의 의병은 작전대로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곽재우와 이달(李達)만이 군사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敏)]]이 불과 3천 8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시바 토오겐로[羽柴藤元郞]가 지휘하는 왜군 4~5만여 명을 맞아서, 1592년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10여 일 동안 4, 5차례 큰 싸움을 치루면서 공방전을 벌렸는데, 10월 11일 곽재우의 원군이 들어와서 대공세를 전개하여 진주성의 포위를 푸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치료를 받다가 절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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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사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서 죽고, 왜군의 기세가 강하여 최경회 등의 의병은 작전대로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곽재우와 이달(李達)만이 군사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敏)]]이 불과 3천 8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시바 토오겐로[羽柴藤元郞]가 지휘하는 왜군 4~5만여 명을 맞아서, 1592년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10여 일 동안 4, 5차례 큰 싸움을 치루면서 공방전을 벌렸는데, 10월 11일 곽재우의 원군이 들어와서 대공세를 전개하여 진주성의 포위를 푸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치료를 받다가 절명하였다.
  
 
그해 11월 정부에서 의병장 최경회를 포상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고, 12월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김면(金沔)이 죽자, 최경회를 경상우도병마사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참조.) 그리하여,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에서 경상우도 병마사로 옮겨, 의병 대신에 관군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전라좌도의 의병은 문홍헌에게 넘겨주었다.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에서 최경회를 경상도관찰사로 추천하였으나, 선조가 미심쩍어 하여 감사에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그해 11월 정부에서 의병장 최경회를 포상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고, 12월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김면(金沔)이 죽자, 최경회를 경상우도병마사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참조.) 그리하여,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에서 경상우도 병마사로 옮겨, 의병 대신에 관군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전라좌도의 의병은 문홍헌에게 넘겨주었다.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에서 최경회를 경상도관찰사로 추천하였으나, 선조가 미심쩍어 하여 감사에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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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거의 성립되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고 명나라 군사도 일단 전투를 중단하자, 일본의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와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제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주력 부대를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켰는데, 그 군사 규모가 모두 5~6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해 6월 카토오 키요마사는 화의의 조건으로 사로잡혔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등을 돌려보냈다. 조선에서 방심하는 틈을 타서 카토오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카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거의 성립되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고 명나라 군사도 일단 전투를 중단하자, 일본의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와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제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주력 부대를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켰는데, 그 군사 규모가 모두 5~6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해 6월 카토오 키요마사는 화의의 조건으로 사로잡혔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등을 돌려보냈다. 조선에서 방심하는 틈을 타서 카토오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카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우도병마사최경회가 5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진주성에 들어가니, 진주 목사서예원(徐禮元)이 합천 의병장 김준민과 김해부사(金海府使)이종인(李宗仁) 등과 진주성을 수비할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뒤이어 충청도 병마사[[황진(黃進)]]이 7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고, 전라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4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전라도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이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 밖에 각지의 의병장들이 2~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계속 성안으로 들어왔다. 최경회는 문홍헌에게 연락하여 전라좌도 의병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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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우도병마사최경회가 5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진주성에 들어가니, 진주 목사서예원(徐禮元)이 합천 의병장 김준민과 김해부사(金海府使)이종인(李宗仁) 등과 진주성을 수비할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뒤이어 충청도 병마사[[황진(黃進)]]이 7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고, 전라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4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전라도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이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 밖에 각지의 의병장들이 2~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계속 성안으로 들어왔다. 최경회는 문홍헌에게 연락하여 전라좌도 의병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은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벌어졌다. 진주성 안의 군관민(軍官民)이 모두 힘을 합쳐서 왜군과 싸웠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어, 진주성 안에 있던 사람 5~6만여 명이 모두 죽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과 고종후 등과 대청(大廳) 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이곳을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 술을 마시고 대청에 불을 질러서 스스로 불에 타서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바로 촉석루로 기어 올라와서 코앞에 들이닥치므로, 최경회는 김천일·고종후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임금에게 얼른 두 번 절하고, 남강에 차례로 몸을 던져서 장렬히 목숨을 끊었다. 이때 전라좌도 의병장 문홍헌도 따라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주성의 남녀들이 앞을 다투어 강물로 뛰어들어 수만 명의 떼죽음하여 진주 남강(南江)이 흐름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1593년 6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족 비극이 진주 남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형 최경장은 <진주성 싸움> 이후에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경상도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제2차 진주성 싸움>은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벌어졌다. 진주성 안의 군관민(軍官民)이 모두 힘을 합쳐서 왜군과 싸웠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어, 진주성 안에 있던 사람 5~6만여 명이 모두 죽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과 고종후 등과 대청(大廳) 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이곳을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 술을 마시고 대청에 불을 질러서 스스로 불에 타서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바로 촉석루로 기어 올라와서 코앞에 들이닥치므로, 최경회는 김천일·고종후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임금에게 얼른 두 번 절하고, 남강에 차례로 몸을 던져서 장렬히 목숨을 끊었다. 이때 전라좌도 의병장 문홍헌도 따라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주성의 남녀들이 앞을 다투어 강물로 뛰어들어 수만 명의 떼죽음하여 진주 남강(南江)이 흐름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1593년 6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족 비극이 진주 남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형 최경장은 <진주성 싸움> 이후에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경상도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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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였다.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느라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돌아다니면서 1년 이상 노숙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신념은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병마사(兵馬使)에 승진되었을 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창의사김천일과 함께 전라도 의병을 통솔할 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내리는 명령이 한 번도 서로 상반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침착한 최경회가 과격한 김천일의 주장을 받아 들여 명령을 조정하였기 때문이다.(『선조수정실록』 참조.)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 대신이 경상도 관찰사김륵(金玏)을 대신할 인물로 최경회를추천하면서 그가 “침착하고 중후하며 지략이 있어서 감사에 적당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참조.)
 
최경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였다.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느라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돌아다니면서 1년 이상 노숙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신념은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병마사(兵馬使)에 승진되었을 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창의사김천일과 함께 전라도 의병을 통솔할 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내리는 명령이 한 번도 서로 상반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침착한 최경회가 과격한 김천일의 주장을 받아 들여 명령을 조정하였기 때문이다.(『선조수정실록』 참조.)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 대신이 경상도 관찰사김륵(金玏)을 대신할 인물로 최경회를추천하면서 그가 “침착하고 중후하며 지략이 있어서 감사에 적당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참조.)
  
최경회가 일찍이 진도(珍島)의 수령에 있을 때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부질없이 허리춤을 만지니, 칼집이 우는데[浪撫腰間匣劍鳴], 시대가 태평하여 변방의 경보가 끊어진 지 오래도다[時平久絶報邊聲]. 한나라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지금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如令衛霍生今世], 헛되이 늙어서 성공하지 못하고 이름도 없었을 것을[虛老無成沒姓名].”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이 그 시를 읽어보고 탄복하기를, “그가 스스로 장수의 재목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결국 국가의 대사(大事)를 위해 죽었으니, 평생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국조인물고』「최경회 유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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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가 일찍이 진도(珍島)의 수령에 있을 때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부질없이 허리춤을 만지니, 칼집이 우는데[浪撫腰間匣劍鳴], 시대가 태평하여 변방의 경보가 끊어진 지 오래도다[時平久絶報邊聲]. 한나라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지금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如令衛霍生今世], 헛되이 늙어서 성공하지 못하고 이름도 없었을 것을[虛老無成沒姓名].”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이 그 시를 읽어보고 탄복하기를, “그가 스스로 장수의 재목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결국 국가의 대사(大事)를 위해 죽었으니, 평생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국조인물고』「최경회 유사」 참조.)
  
 
1747년(영조 23) 1월 경상우도[[병영(兵營)]]에서 옛날 도장 한 개를 바치면서 진주 사람이 남강 물가에서 주웠다고 하였다. 그 도장의 앞면에는 ‘경상우도 병사의 직인[慶尙右道兵使印]’이라고 전각(篆刻)을 새기고, 그 배면(背面)에는 ‘[[만력(萬曆)]] 10년(1582년, 선조 15년)에 만들었다[萬曆十年造]’고 새겨져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때 병마사최경회가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그 직인(職印)이었다. [[전자(篆字)]]로 새긴 글자 흔적이 약간 남았는데, 그 위에 [[만력(萬曆)]]이라는 연호가 분명하였으므로, 영조가 이것을 보고서 탄식하기를, “옛날의 인장을 가져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바치는 것과 같다. 또 인장 위에 새겨진 연월(年月)을 보니,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이조로 하여금 최경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고, 또 인장을 넣는 [[갑(匣)]]을 만들어 진주 고을에 보내어 간직하도록 하였다. 또 영조가 스스로 [[명(銘)]]을 지어 그 갑 위에 새기기를,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백여 년이 지났네.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새겨진 전자가 완연한데, 촉석루에서 뛰어난 의열을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그 충절(忠節)을 기리게 하노라.” 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참조, 『임하필기』권13 참조.)
 
1747년(영조 23) 1월 경상우도[[병영(兵營)]]에서 옛날 도장 한 개를 바치면서 진주 사람이 남강 물가에서 주웠다고 하였다. 그 도장의 앞면에는 ‘경상우도 병사의 직인[慶尙右道兵使印]’이라고 전각(篆刻)을 새기고, 그 배면(背面)에는 ‘[[만력(萬曆)]] 10년(1582년, 선조 15년)에 만들었다[萬曆十年造]’고 새겨져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때 병마사최경회가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그 직인(職印)이었다. [[전자(篆字)]]로 새긴 글자 흔적이 약간 남았는데, 그 위에 [[만력(萬曆)]]이라는 연호가 분명하였으므로, 영조가 이것을 보고서 탄식하기를, “옛날의 인장을 가져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바치는 것과 같다. 또 인장 위에 새겨진 연월(年月)을 보니,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이조로 하여금 최경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고, 또 인장을 넣는 [[갑(匣)]]을 만들어 진주 고을에 보내어 간직하도록 하였다. 또 영조가 스스로 [[명(銘)]]을 지어 그 갑 위에 새기기를,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백여 년이 지났네.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새겨진 전자가 완연한데, 촉석루에서 뛰어난 의열을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그 충절(忠節)을 기리게 하노라.” 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참조, 『임하필기』권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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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년(영조 29) 영조가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영조실록』 참조.)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도 진주의 창렬사, 전라도 화순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인조와 숙종 때 조야에서 최경회에게 시호는 내려달라는 소청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증직만 여러 차례 이루어지고 시호는 내려주지 않았다. 1725년(영조 1) 9월 전라도 유생(儒生)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한 선비가 호남 지방에서 많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사람은 김천일·고경명·최경회 세 분입니다. 성상이 임어(臨御)하던 때에 김천일·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나 유독 최경회만 같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은전의 시호를 특별히 내려주소서.” 하니, 영조가 비답하기를,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영조실록』 참조.)
 
1753년(영조 29) 영조가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영조실록』 참조.)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도 진주의 창렬사, 전라도 화순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인조와 숙종 때 조야에서 최경회에게 시호는 내려달라는 소청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증직만 여러 차례 이루어지고 시호는 내려주지 않았다. 1725년(영조 1) 9월 전라도 유생(儒生)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한 선비가 호남 지방에서 많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사람은 김천일·고경명·최경회 세 분입니다. 성상이 임어(臨御)하던 때에 김천일·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나 유독 최경회만 같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은전의 시호를 특별히 내려주소서.” 하니, 영조가 비답하기를,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영조실록』 참조.)
  
부인 나주김씨(羅州金氏)는 김원(金遠)의 딸이고, 아들 최홍기(崔弘器)는 [[참봉(參奉)]]을 지냈다. 후일에 경상도병사최경회의 아들 최홍기가 충청도병사[[황진(黃進)]]의 아들 황정직(黃廷稷)를 만났더니, 참봉황정직이 참봉최홍기의 손을 맞잡고 울면서, “우리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와 더불어 진주성을 지키다가 함께 왜적에게 죽었다. 너는 흉악한 왜적이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을 어찌 잊겠는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말 것인가. 천지가 있고 일월이 있고 귀신이 있어서 지켜본다.” 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활과 칼을 움켜잡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권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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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나주김씨(羅州金氏)는 김원(金遠)의 딸이고, 아들 최홍기(崔弘器)는 [[참봉(參奉)]]을 지냈다. 후일에 경상도병사최경회의 아들 최홍기가 충청도병사[[황진(黃進)]]의 아들 황정직(黃廷稷)를 만났더니, 참봉황정직이 참봉최홍기의 손을 맞잡고 울면서, “우리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와 더불어 진주성을 지키다가 함께 왜적에게 죽었다. 너는 흉악한 왜적이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을 어찌 잊겠는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말 것인가. 천지가 있고 일월이 있고 귀신이 있어서 지켜본다.” 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활과 칼을 움켜잡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권73 참조.)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2:55 기준 최신판




총론

[1532년(중종 27)∼1593년(선조 26) = 62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 의병장(義兵將). 행직은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 시호는 충의(忠毅), 증직(贈職)은 좌찬성(左贊成)이다.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전라도 화순(和順)의 능주(陵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이고, 어머니 순창임씨(淳昌林氏)는 임철공(林鐵恭)의 딸이다. 송천(松川)양응정(楊應鼎)·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고, 1567년(선조 즉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방목』참조.)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 영해 군수(寧海郡守)가 되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74년(선조 7) 선조가 문신(文臣) 2품 이하 관원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였는데, 최경회가 점수 25푼(分)으로 1등 장원을 차지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조.) 여기서 그가 비록 문과 출신이지만, 활 쏘고 말 타는 무예(武藝)에도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후일 그가 의병장이 되어 왜군을 물리친 것도 무예가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1575년(선조 8) 전라도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재임하다가, 왜구의 방어를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전라 좌수사김지(金墀)와 함께 파직되었다.(『선조실록』 참조.) 1583년(선조 16) 선조가 비변사(備邊司)당상관(堂上官)들에게 각각 인재를 추천하게 하자, 영의정박순(朴淳)이 최경회를 서익(徐益)과 함께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고 추천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조.) 이리하여 전주부사(全州府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부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 화순으로 돌아와 여묘살이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다가,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화순 고을 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해 7월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므로 그 휘하에 있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의병 8백여 명을 최경회가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전 전주 부사최경회가 고경명 대신에 전라도 의병장에 추대되어, 송골매 ‘골(鶻)’자를 전라도 의병의 표신(標信)으로 삼았다.(『선조실록』 참조.)

이 때 전 임실 현감(任實縣監)임계영(任啓英)도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최경회는 전라좌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임계영은 전라우도의 의병을 거느렸다. 의병장 최경회는 전라좌도 의병을 이끌고, 금산과 무주(茂州)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왜군을 막았다. 그는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 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금릉(金陵)의 개령(開寧)에 진을 치고, 감히 재를 넘어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였으므로, 전라도가 온전하게 지켜졌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최경회 유사(崔慶會遺事)」 참조.) 그해 10월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는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등과 연락하여 경상도 개령·성주(星州)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할 작전을 의논하고, 두 도(道)의 의병만으로 왜군을 격퇴시킬 것을 약속하였으나, 바로 그때 <제1차 진주성(晉州珹) 싸움>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진주성(晉州珹) 싸움> 최경회

1592년(선조 25)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왜군들이 여러 지역의 군사를 모아서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성일(金誠一)이 호남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전라좌도 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우도 의병장 임계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선조수정실록』 참조.) 최경회가 전라좌도 의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관찰사김성일은 최경회의 전라좌도 의병을 진주(晉州)의 살천창(薩川倉)에 주둔하게 하였다. 관찰사김성일은 진주성에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을 한꺼번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에게 진주성의 서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의령(宜寧)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진주성의 동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또 합천(陜川)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에게 북문으로 들어가고, 고성(固城) 의병장 조응도(趙凝道) 등에게 남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감사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서 죽고, 왜군의 기세가 강하여 최경회 등의 의병은 작전대로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곽재우와 이달(李達)만이 군사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敏)이 불과 3천 8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시바 토오겐로[羽柴藤元郞]가 지휘하는 왜군 4~5만여 명을 맞아서, 1592년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10여 일 동안 4, 5차례 큰 싸움을 치루면서 공방전을 벌렸는데, 10월 11일 곽재우의 원군이 들어와서 대공세를 전개하여 진주성의 포위를 푸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적의 총탄을 맞고 치료를 받다가 절명하였다.

그해 11월 정부에서 의병장 최경회를 포상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고, 12월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김면(金沔)이 죽자, 최경회를 경상우도병마사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참조.) 그리하여,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에서 경상우도 병마사로 옮겨, 의병 대신에 관군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전라좌도의 의병은 문홍헌에게 넘겨주었다.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에서 최경회를 경상도관찰사로 추천하였으나, 선조가 미심쩍어 하여 감사에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거의 성립되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고 명나라 군사도 일단 전투를 중단하자, 일본의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와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제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주력 부대를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켰는데, 그 군사 규모가 모두 5~6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해 6월 카토오 키요마사는 화의의 조건으로 사로잡혔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등을 돌려보냈다. 조선에서 방심하는 틈을 타서 카토오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카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우도병마사최경회가 5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진주성에 들어가니, 진주 목사서예원(徐禮元)이 합천 의병장 김준민과 김해부사(金海府使)이종인(李宗仁) 등과 진주성을 수비할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뒤이어 충청도 병마사황진(黃進)이 7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고, 전라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4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전라도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이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 밖에 각지의 의병장들이 2~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계속 성안으로 들어왔다. 최경회는 문홍헌에게 연락하여 전라좌도 의병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은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벌어졌다. 진주성 안의 군관민(軍官民)이 모두 힘을 합쳐서 왜군과 싸웠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어, 진주성 안에 있던 사람 5~6만여 명이 모두 죽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과 고종후 등과 대청(大廳) 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이곳을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 술을 마시고 대청에 불을 질러서 스스로 불에 타서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바로 촉석루로 기어 올라와서 코앞에 들이닥치므로, 최경회는 김천일·고종후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임금에게 얼른 두 번 절하고, 남강에 차례로 몸을 던져서 장렬히 목숨을 끊었다. 이때 전라좌도 의병장 문홍헌도 따라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주성의 남녀들이 앞을 다투어 강물로 뛰어들어 수만 명의 떼죽음하여 진주 남강(南江)이 흐름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1593년 6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족 비극이 진주 남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형 최경장은 <진주성 싸움> 이후에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경상도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인조 때 은봉(隱峰)안방준(安邦俊))이 병마사최경회 이하 16명의 호남 의병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호남의병록(湖南義兵錄)』을 편찬 간행하였다.(『포저집(浦渚集)』 권27 참조.)

성품과 일화

최경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였다.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느라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돌아다니면서 1년 이상 노숙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신념은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병마사(兵馬使)에 승진되었을 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창의사김천일과 함께 전라도 의병을 통솔할 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내리는 명령이 한 번도 서로 상반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침착한 최경회가 과격한 김천일의 주장을 받아 들여 명령을 조정하였기 때문이다.(『선조수정실록』 참조.) 1593년(선조 26) 5월 의정부 대신이 경상도 관찰사김륵(金玏)을 대신할 인물로 최경회를추천하면서 그가 “침착하고 중후하며 지략이 있어서 감사에 적당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참조.)

최경회가 일찍이 진도(珍島)의 수령에 있을 때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부질없이 허리춤을 만지니, 칼집이 우는데[浪撫腰間匣劍鳴], 시대가 태평하여 변방의 경보가 끊어진 지 오래도다[時平久絶報邊聲]. 한나라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지금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如令衛霍生今世], 헛되이 늙어서 성공하지 못하고 이름도 없었을 것을[虛老無成沒姓名].”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이 그 시를 읽어보고 탄복하기를, “그가 스스로 장수의 재목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결국 국가의 대사(大事)를 위해 죽었으니, 평생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국조인물고』「최경회 유사」 참조.)

1747년(영조 23) 1월 경상우도병영(兵營)에서 옛날 도장 한 개를 바치면서 진주 사람이 남강 물가에서 주웠다고 하였다. 그 도장의 앞면에는 ‘경상우도 병사의 직인[慶尙右道兵使印]’이라고 전각(篆刻)을 새기고, 그 배면(背面)에는 ‘만력(萬曆) 10년(1582년, 선조 15년)에 만들었다[萬曆十年造]’고 새겨져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때 병마사최경회가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그 직인(職印)이었다. 전자(篆字)로 새긴 글자 흔적이 약간 남았는데, 그 위에 만력(萬曆)이라는 연호가 분명하였으므로, 영조가 이것을 보고서 탄식하기를, “옛날의 인장을 가져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바치는 것과 같다. 또 인장 위에 새겨진 연월(年月)을 보니,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 하였다. 그리하여 영조는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이조로 하여금 최경회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고, 또 인장을 넣는 갑(匣)을 만들어 진주 고을에 보내어 간직하도록 하였다. 또 영조가 스스로 명(銘)을 지어 그 갑 위에 새기기를,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백여 년이 지났네.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새겨진 전자가 완연한데, 촉석루에서 뛰어난 의열을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그 충절(忠節)을 기리게 하노라.” 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참조, 『임하필기』권13 참조.)

시호와 후손

1753년(영조 29) 영조가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영조실록』 참조.)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도 진주의 창렬사, 전라도 화순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인조와 숙종 때 조야에서 최경회에게 시호는 내려달라는 소청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증직만 여러 차례 이루어지고 시호는 내려주지 않았다. 1725년(영조 1) 9월 전라도 유생(儒生)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한 선비가 호남 지방에서 많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사람은 김천일·고경명·최경회 세 분입니다. 성상이 임어(臨御)하던 때에 김천일·고경명 두 신하는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나 유독 최경회만 같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은전의 시호를 특별히 내려주소서.” 하니, 영조가 비답하기를,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영조실록』 참조.)

부인 나주김씨(羅州金氏)는 김원(金遠)의 딸이고, 아들 최홍기(崔弘器)는 참봉(參奉)을 지냈다. 후일에 경상도병사최경회의 아들 최홍기가 충청도병사황진(黃進)의 아들 황정직(黃廷稷)를 만났더니, 참봉황정직이 참봉최홍기의 손을 맞잡고 울면서, “우리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와 더불어 진주성을 지키다가 함께 왜적에게 죽었다. 너는 흉악한 왜적이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을 어찌 잊겠는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말 것인가. 천지가 있고 일월이 있고 귀신이 있어서 지켜본다.” 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활과 칼을 움켜잡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권73 참조.)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금계일기(錦溪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계집(桐溪集)』
  • 『면암집(勉菴集)』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미암집(眉巖集)』
  • 『송천유집(松川遺集)』
  • 『건재집(健齋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