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전(朴光前)"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22일 (금) 01:37 판




총론

[1526년(중종21)~1597년(선조30) = 7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장(義兵將).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본관은 진원(珍原)인데,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고, 전라도 명유(名儒)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71년(선조4) 유희춘(柳希春) 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있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이 되었다. 헌릉(獻陵)으로 옮겼으나 그만 두었다가, 다시 빙고(氷庫)별좌(別坐)에 제수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왕자일 때 그 사부(師傅)로 추천되어 광해군을 가르쳤다.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함열현감(咸悅縣監)이 되었는데, 일 때문에 감사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뒤에 회덕현감(懷德縣監)이 되었으나, 상관의 뜻을 따르지 않다가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任啓英) 등과 함께 전라도 보성(寶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향병(鄕兵) 7백여 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장남 박근효(朴根孝)를 참모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게 되자, 임계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구가 또 호남 지방을 침범할 것에 대비하여, 전 판관(判官)송홍렬(宋弘烈), 생원(生員)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이 악화되어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집으로 『죽천집((竹川集)』이 있다.

호남의 명유

어린 시절부터 문장을 잘 지었으므로 부형(父兄)이 과거 공부를 권하였으나, 뜻을 달리하여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깊이 연구하여 그 참뜻을 터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사대부가 모두 도학(道學)을 꺼렸으나, 그는 분발하여 도학에 뜻을 두고 주자의 이론을 도학과 연계하려고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산(牛山)안방준이 호남의 명유(名儒)를 논할 때 하서(河書)김인후(金麟厚)를 첫째로 꼽고, 스승 박광전과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 일재(一齋)김감(金勘), 미암(眉巖)유희춘을 그 다음으로 꼽았다고 한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묘소는 전라도 죽산(竹山) 사곡(沙谷)의 언덕에 있는데, 이재(李縡)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뒤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전라도 보성(寶城)에 있는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죽천집(竹川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호사설(星湖僿說)』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