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진(厚州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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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후주에 설치한 독진(獨鎭)으로 첨사진이었음.

개설

후주는 세종대 무창군(茂昌郡)의 작은 규모의 관방인 4곳의 구자(口子) 중 하나였다. 후주구자(厚州口子)는 1459년(세조 5)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까지 4군(四郡)이 모두 폐지되면서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게 폐지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 15)에 후주에 다시 진을 설치했다가 1685년(숙종 11)에 혁파했다. 1796년(정조 20)에 다시 후주진(厚州鎭)을 설치하여 첨사를 파견하고 독진방수장(獨鎭防守將)으로 삼았다. 1822년(순조 22)에 후주진을 고을로 승격하면서 후주부사(厚州府使)를 파견하도록 했다. 1869년(고종 6)에 후주가 강계방영(江界防營)의 관할을 받게 되면서 부사의 칭호를 군수로 바꾸고 읍 명칭을 후창(厚昌)으로 했다.

위치 및 용도

후주는 함경도의 삼수·갑산과 4군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함경북도에 속한 땅이지만 삼수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4군과 인접해 있다. 후주는 동쪽으로 삼수와의 거리가 70여 리(약 27㎞)이고 서쪽으로 강계와의 거리가 1백여 리(약 39㎞)이며, 남쪽으로 함흥까지는 5백여 리(약 196㎞)이다. 장진(長津)과의 거리는 2백여 리(약 77㎞)이다. 서쪽으로 80리쯤(약 31㎞) 되는 곳에 무창(茂昌) 두지동(斗之洞)의 죽전령(竹田嶺)이 있다. 이 고개를 경계로 서쪽은 평안도가 관할하고, 동쪽은 함경도가 관할했다. 평안도 4군의 건너편은 야인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4군이 폐지된 후 그 땅은 야인들이 들어와 살고 해적들이 침략해옴으로 버려진 채 조선 사람들이 그 땅에 들어가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청나라가 거대해진 뒤에는 후주의 건너편과 연강(沿江)에 잡다하게 살던 호인(胡人)들이 모두 몰려 가버려 140~150년 동안에 압록강 북쪽 1천여 리(약 393㎞)의 땅이 텅 빈 채로 호인들의 거주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후주 땅은 연지평(蓮池坪)과 상패평(祥覇坪) 두 평원이 북쪽으로 압록강을 베고 있어 지형이 낮고 기후도 따스하고 또 서리가 늦게 내려 오곡이 잘 익고 삼과 목화가 잘 자랄 수 있었다. 또한 3백여 리 뻗쳐 있는 후주의 드넓은 땅은 토지가 기름지고 산봉우리가 겹겹이 쌓여 곡식도 잘 자랐다. 이처럼 땅이 비옥하여 곡물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사람들이 다 후주에서 양식을 구해다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는 밑천을->으로 삼았다. 결국 후주진이 모양을 갖춘 것은 관서와 접경하고 있는 까닭에 후주의 군을 폐하고 둔(屯)을 설치할 초기에 그곳의 거주민이 그쪽 경계로 흘러 들어가 초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1794년(정조 18) 당시 불법을 무릅쓰고 폐지된 땅 후주에 들어와 사는 백성이 민호가 88호, 인구는 190명에 이르렀다.

변천 및 현황

세종대 후주 등지의 민호를 조정해서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했다. 1440년(세종 22)에 여연(閭延)의 손량(孫梁)·후주(厚州) 등지의 민호(民戶)를 갈라서 여연군(閭延郡) 상무로보(上無路堡)에 붙여 무창현(茂昌縣)으로 삼았다가 무창군이 되었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좌도(左道)·우도(右道)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 위원군(渭原郡) 위로부터 후주구자(厚州口子)의 방비는 남도 여러 고을 가운데 좌도의 충보갑사(充補甲士)와 총통군(銃筒軍)·방패(防牌) 등이 나누어 담당하였다. 이후 좌·우도가 합쳐지면서 1454년(단종 2)에 후주 이하 의주(義州) 이상의 각처에 방어(防禦)의 중요성을 가리어 좌·우도의 군사들을 합한 뒤 다시 나눠서 방비하도록 하였다.

4군이 폐지된 후 후주구자도 폐지되었지만 함경도 후주의 고미평(姑未坪)부터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의 연강 아래위까지가 모두 조선의 변경이었다. 특히 삼수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약 27㎞)를 내려가서 있는 후주의 옛 땅은 들이 광활하고 전토가 비옥해 사람들이 개간하며 살 만했다. 이에 1674년(현종 15)에 후주에 진을 설치하고, 어면보(魚面堡)를 그곳으로 옮기고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를 종3품의 무관직인 첨사(僉使)로 승직시켰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그 후 1685년(숙종 11)에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일이 발생하자 후주를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둔 채 장진의 강가에 어면진을 설치하여 후주의 백성과 군졸들은 모두 어면(魚面)에 소속시켰다(『숙종실록』 11년 11월 13일). 그러나 후주는 강변에 자리 잡고 있고 남쪽을 향해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지세가 조금 낮은 데다가 토지도 기름졌기 때문에 불법을 무릅쓰고 들어와 경작하고 사는 백성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후주와 4군이 버려진 채로 비어 있어 그 일대가 서로 통하지 못했던 데다가 삼수와도 수백 리 떨어져 있고 봉우리와 고개가 첩첩으로 가로막혀 길이 험한 탓에 그 사이의 진영과 보루들이 다 쇠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1796년 다시 후주진을 설치하고 어면파수(魚面把守)이건수(李健秀)를 첨사로 삼았다(『정조실록』 20년 11월 19일). 그리고 1797년에는 진장(鎭將)의 입방과 사졸의 파수는 혁파하고, 해진의 장(將)으로 하여금 오로지 관리하도록 했다(『정조실록』 21년 11월 19일). 1798년에는 후주첨사(厚州僉使)의 명칭을 독진방수장(獨鎭防守將)으로 정하고, 그의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해조(該曹)에서 만들어 보내도록 했다(『정조실록』 22년 7월 21일).

1801년(순조 1)에 후주첨사(厚州僉使)는 장진의 예에 따라 변지(邊地)의 이력(履歷)을 시행하도록 했다(『순조실록』 1년 6월 5일). 1813년에는 자작(自作)·어면(魚面)·강구(江口)·신방(神方)·묘파(廟坡) 등 5개진을 폐지하도록 했다(『순조실록』 13년 4월 5일). 후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그곳이 내지가 된 때문이다. 다만 별해진(別害鎭)은 독립된 진으로 남겨 삼수에 속하도록 했다. 1814년에는 강계부사의 청에 따라 강계의 죽전령 동쪽 땅을 후주로 나누어 주되, 인삼 캐는 일과 방수하는 일은 평안도와 함경도관찰사가 서로 왕복 조정해서 절목을 마련하도록 했다. 강계의 삼 캐는 사람들이 후주 경내의 험한 산 깊은 골짜기인 금신·호지(好地) 등처까지 와도 후주에서는 금지시키지 않는데, 강계에서는 후주 백성들이 무창의 개간할 만한 땅인 강 연안의 평야 지대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순조실록』 14년 10월 4일).

1822년에는 후주가 함경북도에서 가장 긴요한 곳이라 하여 영읍(營邑)을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던 데다가 후주 백성들의 소원도 그러하여 후주진을 읍으로 승격하여 후주부사(厚州府使)를 파견하도록 했다. 후주부사는 1869년(고종 6)에 군수(郡守)로 하비(下批)되었다. 후주가 강계방영(江界防營)의 관할을 받게 되면서 강계부사와 차이를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읍호(邑號)는 후주가 아닌 후창(厚昌)으로 했다. 후창군(厚昌郡)을 옮겨 설치함에 따라 구갈파(舊乫坡) 서쪽 200여 리(약 77㎞) 구간의 방어가 허술해지자 1873년(고종 10)에 후주읍의 옛터에 연성진(蓮城鎭)을 설치하고 첨사를 파견했다(『고종실록』 10년 3월 5일).

형태

후주진의 소재지는 상패(祥覇) 동평(東坪) 십팔봉(十八峰) 아래에 있다. 관제(管制)는 독진(獨鎭)으로서 겸방수장(兼防守將)을 두었지만 장진부(長津府)를 의식하여 남관우방수장(南關右防守將)으로 했다. 진에 금도청(禁盜廳)을 설치했다. 후주구자에는 동봉(東峯)에 서봉(西峯)을 향하는 연대(烟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종대에 보(堡)를 설치하면서 봉수는 상패평 동쪽 십팔봉에서 시작하여 기린산(麒獜山)을 거쳐 옛 가을파지(加乙坡知)에 전달하도록 했는데, 그대로 후주의 두 곳의 봉수대와 옛 가을파지의 강변에 있는 두 곳의 봉수대를 설치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후주는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가 되어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함흥 땅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사군과 강계(江界) 등지로 해서 압록강을 건너 동령부(東嶺府) 올랄성(兀喇城)에 들어가서 공격하여 야인들을 몰아내고 땅을 개척하는 공을 거둔 곳이었다. 또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1367년(고려 공민왕 16) 5월에 태종을 낳은 곳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