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옹주(和寧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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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3년(영조 29)~1821년(순조 21) = 69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문숙의(文淑儀)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모략하여 작위가 발탁되고 폐출되었다. 친동생은 화길옹주(和吉翁主)이다. 부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청성위(靑城尉)심능건(沈能建)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화령옹주(和寧翁主)는 1753년(영조 29) 영조와 문숙의의 2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1764년(영조 40) 삭녕군수(朔寧郡守)심정지(沈鼎之)의 아들 심능건을 화령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청성위로 삼았다.(『영조실록(英祖實錄)』 40년 10월 16일) 그리고 두 달 후 화령옹주의 가례(嘉禮)를 위해 가례청(嘉禮廳)이 설치되었고, 화령옹주는 심능건과 혼인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40년 12월 20일)

화령옹주의 어머니 문숙의는 본인의 오라버니인 문성국(文聖國) 및 김상로(金尙魯)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무고(誣告)하며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3일) 이에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正祖)는 즉위 직후 윤음을 내려 문성국과 문숙의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문숙의의 작호를 삭탈하고, 사저에 안치하였다가 폐출한 후 사사(賜死)하였으며, 문성국과 그 어머니는 각각 노비로 만들었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30일),(『정조실록』 즉위년 5월 14일),(『정조실록』 즉위년 8월 10일) 이때 신하들은 화령옹주의 작호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안치하기를 청하였지만, 정조가 영조의 혈육이며 문성국 등이 일을 꾸밀 때는 어린 아기였을 뿐이라며 옹호한 덕분에 화령옹주는 무사할 수 있었다.[『일성록』정조 즉위년 5월 14일]

1821년(순조 2)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순조는 장생전(長生殿)의 퇴판(退板) 1부(部)를 보냈으며, 예장(禮葬)과 조제(弔祭)는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고 하였다.(『순조실록』 2년 9월 3일)

묘소 및 후손

화령옹주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다.

화령옹주는 부마 심능건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심의장(沈宜長)인데, 후사 없이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심능열(沈能烈)의 아들 심의관(沈宜寬)을 양자로 들였다. 1녀는 이규신(李圭信)과 결혼하였고, 2녀는 이재교(李在敎)와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