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길옹주(和吉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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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4년(영조 30)~1772년(영조 48) = 19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문숙의(文淑儀)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모략하여 작위가 발탁되고 폐출되었다. 친언니는 화령옹주(和寧翁主)이다. 부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능성위(綾城尉)구민화(具敏和)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1754년(영조 30) 화길옹주(和吉翁主)는 영조와 문숙의의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1764년(영조 40) 화길옹주는 구선행(具善行)의 손자이자 구현겸(具顯謙)의 아들인 구민화와 정혼하였고, 구민화는 능성위에 봉해졌다.(『영조실록』 40년 12월 11일) 그리고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 10월 화길옹주와 부마 구민화는 혼례를 하였다.(『영조실록』 41년 7월 12일) 그러나 화길옹주는 1772년(영조 48) 19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영조실록』 48년 12월 18일)

한편 화길옹주의 어머니 문숙의는 영조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으나, 오라버니 문성국(文聖國) 등과 결탁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사도세자를 무고(誣告)하여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신을 할 때면 민가에서 아들을 구하며 세자 자리를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3일) 그 결과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正祖)는 즉위 직후 윤음을 내려 문성국과 문숙의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문숙의의 작호를 삭탈하고, 사저에 안치하였다가 폐출한 후 사사(賜死)하였으며, 문성국과 그 어머니는 각각 노비로 만들었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30일),(『정조실록』 즉위년 5월 14일),(『정조실록』 즉위년 8월 10일)

묘소와 자녀

화길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426-1에 있다.

화길옹주는 부마 구민화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구명희(具命喜)이고, 딸들은 각각 김이초(金履初)와 윤영명(尹永明)과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