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서(洪禹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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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2년(현종3)∼1716년(숙종42) = 55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자는 중웅(仲熊), 호는 서암(西巖)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순흥부사(順興府使)홍수량(洪受湸)이고,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송년(趙松年)의 딸이다. 관찰사홍처후(洪處厚)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홍수헌(洪受瀗)의 조카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90년(숙종16) 29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음직(蔭職)으로 숭릉(崇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벼슬하지 않고 사임하였다. 1702년(숙종28) 숙종이 알성시(謁聖試)를 시행하였는데,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 중이던 홍우서는 41세의 나이로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이때 고시관(考試官)홍수헌(洪受瀗)이 홍우서의 막내 삼촌이었기 때문에 그는 조카를 부정 합격시켰다는 고발을 당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것이 모함이란 것을 알고 고발한 이들과 사주한 자들을 모두 정배(定配)하였다. 홍우서는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1703년(숙종29) 세자시강원 설서 · 사서에 임명되었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704년(숙종30) 승정원 주서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 · 대교 · 봉교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예조 낭관 · 병조 낭관 · 이조 낭관을 지냈다.

1708년(숙종34) 사간원 정언 · 사헌부 헌납을 역임하였고, 홍문관에서 부수찬 · 수찬이 되었으며 1709년(숙종35)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하였다. 1710년(숙종36)에 성균관 유생 홍주형(洪胄亨) 등이, 성균관에서 윤증(尹拯)과 최석정(崔錫鼎)이 강론할 때 최석정이 지은 『예기유편(禮記類編)』을 참고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주자(朱子)의 설을 배척한다며 상소하였다가 귀양을 갔다. 홍문관 교리홍우서는 대사헌정호(鄭澔) 등과 홍주형 등을 구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리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각각 귀양을 갔다.(『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 12) 전라도 무안(務安)에서 귀양살이하던 홍우서는 사간원의 간청으로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1712년(숙종38) 은율현감(殷栗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영의정서종태(徐宗泰)의 추천으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713년(숙종39) 이조 정랑, 사헌부 헌납, 동부승지를 역임하였고, 1714년(숙종40)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한 정호를 변호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고 서주현감(西州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715년(숙종41) 노론이 『가례원류』 시비(是非)에서 승리하자 그를 칭송하였다. 1716년(숙종42) 3월 8일 병으로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이 55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우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온순하면서도 포용력이 있고 지조가 있었다. 마음은 욕심이 없어 화평하고, 행동은 정성스럽고 성실하여, 마음과 행동이 하나같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았다. 부모가 병환이 났을 때 간호하는 방법과 부모가 돌아갔을 때 곡용(哭踊)하는 절차를 보고 모두 감복하였다. 홍수헌은 언제나 그를 가리켜서 ‘우리 집안의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한편, 1713년(숙종39)에 숙종이 새 우황(牛黃)을 얻고자 수없이 많은 소를 잡았는데, 그때 홍우서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도살을 막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직간하자, 숙종이 깨닫고 즉시 이를 중지시킨 일도 있었다. 그는 젊어 성리학에 관한 여러 저서를 연구해서 심신(心身)의 요체로 삼았고, 제자백가(諸子白家)와 사서(史書)를 널리 탐독하여 학문의 정통성을 지키고 이단(異端)에 현혹되지 않았다. 시문(詩文)이 청건(淸健)하여 아치(雅致)가 있었으며, 서법(書法)도 깊은 경지에 이르러, 깊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아울러 선염(渲染)의 기법도 터득하였다. 평소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책만 가까이 하였다. 관직 생활 중 여가가 있으면,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찾아서 물외(物外)에 정을 붙였다. 이여(李畬)가 “홍우서는 몸이 귀하게 되어도 평소의 절개를 변치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적성(積城) 경룡동(庚龍洞)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이 왼쪽에 묻혔다.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부사(府使)심익선(沈益善)의 딸로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홍계흠(洪啓欽)은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여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냈고, 차남 홍계현(洪啓鉉)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으며, 장녀는 정랑김태연(金泰衍)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남계집(南溪集)』
  • 『죽천집(竹泉集)』
  • 『이우당집(二憂堂集)』
  • 『기원집(杞園集)』
  • 『도운유집(陶雲遺集)』
  • 『서당사재(西堂私載)』
  • 『겸재집(謙齋集)』
  • 『포암집(圃巖集)』
  • 『서암집(恕菴集)』
  • 『병계집(屛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