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洪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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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7년(세조3)∼1513년(중종8) = 57세]. 조선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의 부마(駙馬)이다. 자는 자강(子剛)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홍응(洪應)이고, 어머니 안성이씨(安城李氏)는 부호군이발생(李發生)의 딸이다. 한성부서윤홍심(洪深)의 손자이고, 대사헌홍흥(洪興)의 조카이다.

세조 시대 부마 간택

1466년(세조12)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외동딸 태안군주(泰安郡主)와 혼인하여 당양위(唐陽尉)에 봉해졌다. 의경세자가 1457년(세조3) 나이 20세로 죽었으므로, 세조는 손녀를 위하여 홍상을 직접 부마로 간택하였고, 세조의 사위 의빈(儀賓)정현조(鄭顯祖)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게 하였다. 세조는 그를 사랑하여 항상 어가(御駕)를 수종하게 하였다. 1468년(세조14) 당양군(唐陽君)으로 진봉(進封)되고, 의빈부 승빈(承賓)에 임명되었다.

성종 시대 의빈 활동

성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생부인 의경세자는 덕종이 되었고, 성종의 누이인 태안군주도 명숙공주(明淑公主)가 되었다. 1470년(성종2) 홍상은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품되어, 의빈부 의빈에 임명되었다. 그는 성종과 동갑이었는데, 약관의 나이가 되어 성종이 친정(親政)하자 왕을 도왔다. 또 오위도총부 도총관가 되어 오랫동안 궁궐을 숙위하는 금위병(禁衛兵)을 맡았다. 성종은 그에게 “군정(軍政)은 마땅히 남을 용서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아랫사람들을 침해해서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유시(諭示)하였는데, 그는 여러 차례 도총관을 역임하면서 어명을 지키고 저버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아랫사람들이 그를 원망하지 않고,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한씨(韓氏)가 병이 났을 때, 홍상은 내의원 제조로 어의(御醫)를 거느리고 장모를 성심껏 치료하였다. 성종은 어머니의 병이 완치되자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종1품상 광덕대부(光德大夫)의 품계와 전민(田民)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부마가 내국의 제조에 임명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전토를 내려준 것도 특이한 은전(恩典)이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24) 그는 여러 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임(重任)을 많이 맡았으므로, 여러 의빈들이 그를 어려워하여 감히 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 피화

1495년(연산군1) 의빈으로서 제일 높은 품계인 정1품상 유록대부(綏祿大夫)로 승품되었다. 1496년(연산군2) 성종의 국상(國喪) 중에, 연산군은 당시 사복시 제조인 홍상에게 좋은 말을 궁중 후원에 들이게 하더니,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기도 하고 무희들과 어울려 칼춤까지 추었다. 그리고 많은 암수의 말을 후원에 들여다가 그 말들을 교미(交尾)시키고 무희들과 함께 이것을 보며 소일하였다. 홍상은 궁중의 소문이 궁중 바깥으로 퍼져나갈까 두렵다고 경계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이 사실을 알고 연산군에게 간언을 하였다. 1497년(연산군3) 연산군은 성종 때 폐지되었던 응방(鷹坊)을 다시 설치하고, 홍상을 응방 제조에 임명하였다. 이때의 응방은 왕이 사냥을 할 때 매를 공급하고, 소수의 의빈과 조정의 중신들에게 응패(鷹牌)를 발급하여 매사냥을 통제하였다.

연산군의 정치가 점차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사임하고 궁중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이 과거에 궁중 후원에서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이 외부에 알려진 까닭은 홍상 등이 바깥에 전파한 때문이라고 그 죄를 얽어 맞추어, 그를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의금부에서 그의 죄가 참형에 해당한다고 하자 연산군은 그의 “사형을 감하고, 형장(刑杖)을 속바치게 하여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홍상을 전라도 함평(咸平)으로 유배하였다가 안성(安城)으로 양이(量移)하였다. 연산군은 노여움이 풀리지 않자 거제도(巨濟島)로 이배하였다가,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여 제주(濟州)로 보냈다.

중종 시대 활동

1505년(중종즉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왕은 즉시 충청도관찰사와 전라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홍상을 서울로 송환하게 하고, 노상(路上)에서 위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중종은 서울로 돌아온 홍상을 특별히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하였으나, 그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집에서 은거하였다. 그가 병이 나자, 중종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1513년(중종8) 3월 서울의 집에서 57세로 숨을 거두었다. 1513년(중종8) 4월 9일자 『중종실록(中宗實錄)』「졸기」에, “홍상은 좌의정홍응의 아들로서 태어나서 비록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일찍이 교만한 태도가 없었다.”라고 사신(史臣)이 그에 관해 논평한 것을 볼 수 있다.

성품과 일화

홍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기질은 온화하고 평이하고 생김새가 헌걸차고 도량이 넓었다. 외모와 속마음이 하나로 일치하였고,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여 자신이 부귀한 신분이라고 하여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수하고 모습이 단정하였는데, 세조가 명숙공주의 부마를 간택할 때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한 다음 바로 부마로 삼았다. 홍상이 10세였을 때, 세조의 어가를 따라서 보제원(普濟院)으로 나들이를 갔다. 환관(宦官)이 버들개지를 꺾어 바치고서는 하늘이 축복해서 “하늘 꽃[天花]”을 내리는 것이라고 임금에게 아첨하자 곁에 있던 그는 “천화가 아니고 버들 꽃”이라고 하였다. 이행(李荇)은 비명(碑銘)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그는 어려서부터 강직하여 바른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어렸기 때문에 순진하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나게 되자, 그는 조용히 길을 떠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압송해 가는 관원이 그를 능멸하였으나, 그는 본래 자기가 겪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서 곤욕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천성이 넓은 도량을 타고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

비문과 후손

시호는 소이(昭夷)이다. 이행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용재집(容齋集)』 권10) 명숙공주는 덕종의 외동딸로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외아들 홍백경(洪伯慶)은 무과에 급제하여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璿源系譜)』
  • 『용재집(容齋集)』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허백정집(虛白亭集)』
  • 『퇴계집(退溪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