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주(洪鳳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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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14년(순조 14)~1866년(고종 3) = 53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재영(洪梓榮)이고,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유학(幼學)정약현(丁若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낸 홍낙민(洪樂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홍양한(洪亮漢)이다.

헌종~고종 시대 활동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할아버지 홍낙민이 사망하고 아버지 홍재영이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로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부친과 부인은 사망하였으나, 홍봉주(洪鳳周)는 석방되어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1855년(철종 6) 초 메스트르(Maistre) 신부의 명에 따라 베르뇌(Berneux) 주교의 입국을 돕기 위해 홍봉주는 12월 서울을 떠나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하였고, 이듬해인 1856년(철종 7) 1월(양)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Pourthie)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해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베르뇌 주교를 전동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으로 인도한 뒤 예산으로 다시 내려간 홍봉주는 1861년(철종 12) 3월 다시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와 함께 살며 주교의 일을 도왔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편 1864년(고종 1)부터 러시아가 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정부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홍봉주는 방아책(防俄策)을 제시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1865년(고종 2) 8월 남종삼(南鍾三)과 논의를 하였으나 결과를 내지 못하여 그만두었다. 그런데 9월에 다시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해오자, 그는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처음에 흥선대원군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곧 주교와 면담을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주교와의 면담을 미루다가 1866년(고종 3) 초 <병인박해>를 일으켰고, 홍봉주는 그해 1월 9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추안급국안』],[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몇 차례의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은 홍봉주는 결국 그해 1월 21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말을 퍼트리고 나라를 팔아먹을 흉학한 계획을 세웠다는 죄목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16일),[『추안급국안』],[『포도청등록』],[『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1월 16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17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18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19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0일],(『고종실록』 3년 1월 20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0일, 21일]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치명일기(致命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