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영(洪梓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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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80년(정조 4)~1839년(헌종 5) = 60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프로타시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전라도 전주이다.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낸 홍낙민(洪樂民)이며,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홍양한(洪亮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홍국보(洪國輔)이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가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홍재영(洪梓榮)은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였던 아버지 홍낙민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동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전개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아버지만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 사형선고를 받았고, 홍재영은 배교를 약속하고는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사학징의(邪學懲義)』] 그런데 그는 신문 과정에서 이익운(李益運)의 죽은 아들 이름을 언급하였고, 이후 이익운은 자신의 아들은 천주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 7년 12월 13일),(『순조실록』 7년 12월 19일)

한편 홍재영은 유배지에서 한동안 천주교와 관련 없이 생활하다가 어느 날 다시 천주교를 찾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에 따른 생활을 해나갔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 그러던 가운데 1832년(순조 32) 유배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져 유배에서 풀린 홍재영은 계속해서 광주에서 살다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가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피신해 다니는 교우들을 돌봐주면서 과거 배교했던 일을 뉘우치며 순교할 마음을 먹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 그러던 어느 날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된 홍재영은 광주에서 문초를 받은 후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았다.[『일성록(日省錄)』헌종 5년 8월 19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5년 8월 19일] 혹독한 신문에도 배교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킨 그는 결국 사형판결을 받아 그해 11월 30일 전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승정원일기』헌종 5년 11월 24일],[『일성록』헌종 5년 12월 10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