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민(洪樂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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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1년(영조 27)~1801년(순조 1) = 51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학자이자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루가. 자는 성눌(聖訥)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정언(正言)을 지낸 홍양한(洪亮漢)이며, 어머니는 이종환(李宗煥)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홍국보(洪國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홍중서(洪重敍)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충청도 예산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이주하여 1776년(정조 즉위년) 권철신(權哲身)의 제자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생원(生員)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고, 1789년(정조 13) 문과(文科) 식년시에 합격하여[『국조방목(國朝榜目)』]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이조 전랑(銓郞),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784년(정조 8)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홍낙민(洪樂敏)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고 지도층 신자의 일원이 되어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한 뒤 임금의 명령에 따라 잠시 신앙을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집안에서는 기도생활과 천주교의 교리에 따른 생활을 지속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794년(정조 18)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정식으로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였으나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을묘박해(乙卯迫害)>가 발발해 체포되자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여 가정과 나라에 화를 미치게 하므로 철저히 금지해야한다”고 하였다.[『일성록』정조 19년 8월 1일] 이후 홍낙민은 천주교를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다시 교리를 실천하였고, 이에 1799년(정조 23) 모친상을 당했을 때 신주를 들이지 않았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시작되고, 그해 2월에 체포된 홍낙민은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동료들을 밀고하지는 않았으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표시하자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져 얼마 후인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순조실록』1년 2월 26일)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낙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귀양형을 선고받자 홍낙민은 자신을 문초하던 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지난 날에 한 모든 것은 목숨을 비겁하게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이마두(利瑪竇 : 마테오 리치)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 볼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학자 합니다”이와 같은 홍낙민의 진술에 관원들은 경악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진노하여 홍낙민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라 명령하였다. 극심한 매질을 당하고 옥으로 끌려간 홍낙민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말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