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계흠(玄啓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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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3년(영조 39)~1801년(순조 1) = 39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플로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사망한 현경련(玄敬連)과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사망한 현석문(玄錫文)의 아버지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사수’ 혹은 ‘계온’이라고도 불린 현계흠(玄啓欽)은 서울의 중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은 역관이 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고 살았다. 그러다 1784년(정조 8) 조선에 천주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천주교 교리를 익혀 입교하였다. 1791년(정조 15) 진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제사를 폐지해 문제가 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하자,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금세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신앙을 회복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특히 동료들과 자주 신앙 집회를 갖거나 비신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조선에 밀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도 하였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한편 1797년(정조 21) 9월 현계흠은 동생이 살고 있는 경상도 동래(東萊) 지방에 갔다가 영국 배를 보게 되었는데 훗날 황사영(黃嗣永)을 만나 그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현계흠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자신 때문에 일가친척들이 관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경 포도청에 자수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이후 형조에서 신문을 받다가 외국의 배를 끌어들이고자 편지를 작성하여 문제가 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으로 문초를 받던 황사영에게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10월에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순조 1년 11월 2일],[『승정원일기』순조 1년 11월 4일]

결국 현계흠은 황사영이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로 사형판결을 받고, 그해 11월 5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1월 5일),[『승정원일기』순조 1년 11월 5일],[『사학징의(邪學懲義)』]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