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화왜(向化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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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살던 왜인.

개설

향화왜인(向化倭人)은 고려시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려시대 향화왜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999년(목종 2) 일본국인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항복해 오자 이천군에 살게 하고 편호(編戶)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향화왜인의 수가 많이 증가하였는데, 조선시대 최초의 향화왜인은 1395년(태조 4) 1월 항복한 왜인 표시라(表時羅) 등 4명이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에는 고려 영내에 들어온 외국인의 내주(來住)나 동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인 투화(投化)와 내투(來投)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투화·향화(向化)·내항(來降)·내투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투화와 향화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경국대전』 편찬 시기에 향화라는 용어로 법제화되었다. 『경국대전주해』에 향화는 즉 왜인·야인이 향국투화(向國投化)한 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투화나 향화는 향국투화에서 파생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향화왜인이 나타난 배경은 조선의 왜구 대책과 토지나 식량 부족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인데, 이 당시의 향화왜인은 특히 왜구로서 투항한 자가 많았다. 이는 조선의 왜구 대책에 따라 왜구가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향화왜인은 계속 늘어나 1410년(태종 10)에는 경상도에 나누어 거주하도록 한 향화왜인의 수가 무려 2,000여 명이 넘었다.

향화왜인 가운데 왜구로서 투항한 자는 태조대와 정종대에 집중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왜구인 등육(藤六)과 임온(林溫, 일명 羅可溫)의 부하들로, 태조 말에 투항하여 벼슬을 얻었고 이름도 조선식으로 개명하였다. 향화왜인 대다수가 스스로 향화한 자와 구류왜인(拘留倭人)인데, 이들은 주로 태종대와 세종대에 향화하였으며, 특히 세종대에는 대마도 정벌 당시에 구류된 왜인과 포로가 많았다.

스스로 향화한 왜인은 대부분 대마도 출신으로, 향화의 이유는 농토 부족과 부세의 과중, 기아 등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승려가 향화하는 경우는 시기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수는 많지 않았다. 향화왜인 중에는 특이하게 대마도주가 파견하거나 대마도주의 허락을 받아 향화한 자도 있었으며, 이들은 다른 향화왜인보다 우대받았다. 삼포에 거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 중에서 조선술이나 제련술 등의 기술을 가진 자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향화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초기 향화왜인에 대한 기본 정책은 가는 자는 막지 않고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조선으로 다시 오고 오지 않고는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향화왜인 중에는 향화 후에 조선에 그대로 거주하는 자도 있었지만 본토로 돌아가는 자도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향화왜인 중에는 조선에서 받은 관직이 아닌 대마도만호나 대마도수호만호 또는 왜만호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

이는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왜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구랑(藤九郞)이 호군에 제수된 이후부터는 향화왜인의 범위가 대마도·일기뿐만이 아니라 축전주(筑前州) 등 일본 국내에 거주하는 왜인들에게로 확대되어, 1444년(세종 26) 이후에 일본 거주 수직왜인(受職倭人)이 급증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에서는 처음에 향화왜인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안에 나누어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흥리왜인(興利倭人)과 서로 왕래하는 등의 폐단이 생기자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지방으로 이주시키고 외방(外方) 출입은 물론 사적인 왕래와 통신도 금하였다. 한편 대마도 정벌 이후 병조에서는 구류왜인이나 포로를 왜안(倭案)에 기록하여 관리하면서 쇄환(刷還)할 때 근거로도 활용하였다. 『경국대전』 편찬 시기에 이르러서는 예조(禮曹)에서 향화왜인을 향화안(向化案)에 기록하여 관리하고 병조에서 향화인에 대한 포폄을 실시함으로써, 예조와 병조에서 향화인을 이중으로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향화왜인에 대한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치는 관직의 제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관직에 제수되지 못한 일반 향화왜인은 각 지방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식량과 토지·의복·집 등을 지급하였으며,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동안 전조(田租)·부역·군역을 면제해 주었다. 반면 왜구의 우두머리나 왜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 의술·제련술·조선술 등의 기술이 있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고 서울에서 거주하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관직에 상응하는 녹봉과 월료(月料)·마료(馬料)·의복·집·노비 등을 지급하였고, 이들 중 일부에게는 개명(改名)과 성씨·관향을 내렸다.

변천

조선초기에 왜구 회유책을 실시하여 향화왜인이 급증하였다가,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왜구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1444년에는 수직왜인의 범위가 향화왜인이 아닌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에게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 결과 일본에 거주하는 수직왜인은 증가하였지만 조선의 향화왜인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향화왜인들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항왜(降倭)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명과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1593년 5월경이다. 이때 왜군 100여 명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군영에 투항해 왔고, 그 후에도 많은 왜인들이 조선에 투항해 왔는데 이들 항왜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595년(선조 28) 12월 남부(南部) 주부(主簿)신충일(申忠一)과 마신(馬信)의 대화 내용과 1597년(선조 30) 5월 경상우병사김응서(金應瑞)의 군관인 조개(曺漑)가 적정을 탐지하면서 왜병과 대화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항왜는 최대 10,000명에서 최소 1,000여 명을 헤아릴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1603년(선조 36) 연시로(連時老)가 처와 아들을 이끌고 향화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더 이상 향화왜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의의

조선전기의 향화왜인은 왜구의 토벌에 종군하거나 조선에 침입하였던 적왜(賊倭)를 붙잡아 오는 일, 왜구 및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제공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는 등 왜구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사절의 왕래 및 사행의 호송, 의술·조선술·제련술을 전수하는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향화왜인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 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국학자료원, 1996.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한문종, 『조선전기 향화 수직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5.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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