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降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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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중에서 조선에 투항한 사람.

내용

투항왜(投降倭), 순왜(順倭) 등으로도 불리었다. 항왜는 고려말 조선초에 침입하였던 왜인 중에서도 종종 나타났으나,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조선초 항왜들은 부족한 식량이나 생활고 혹은 조선의 왜구 토벌 등의 요인으로 투항하여 왔다. 이들은 태조·정종대에 왜구로 활동하다가 항복한 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정부는 항왜의 우두머리, 왜구 진압에 공이 많은 자, 기타 기술을 가진 자들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의 항왜 중에는 간혹 왜장(倭將)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체로 지위가 낮고 천한 출신으로서 30세 이전의 왜인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항왜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수하 3,000명을 거느리고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沙也可)를 들 수 있다. 그는 이후 조선 군병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는데, 선조(宣祖)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김해김씨의 성씨, 충선(忠善)이라는 이름,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시기 항왜의 규모는 1592년부터 전쟁이 끝난 시기까지 약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항왜들을 유치하여 이들로부터 무기 제조, 군사 기술을 전습받기도 하였으며, 변방의 방어 및 일본군에 대한 정보 탐색 등에도 활용하였다.

용례

命都堂各司及耆老 會議崔雲海李龜鐵金贇吉金英烈等罪 初乞降倭至慶尙道蔚州浦 賊魁羅可溫 以子都時老伴儻昆時羅 納質於雞林府尹柳亮(『태조실록』 6년 1월 28일)

참고문헌

  • 한문종, 『조선전기 향화·수직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 김문자, 「임란시 항왜문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김선기, 「항왜 사야가의 실존인물로서의 의미와 평가」, 『일어일문학』 43, 2009.
  •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항왜의 유치와 활용」, 『역사와 세계』 3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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