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반(鄕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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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양반 또는 지역에 거주하는 양반.

개설

향반(鄕班)은 양반에는 포함되지만 중앙의 벌열 양반과는 구분되는 지역 사회의 양반을 가리킨다. 향반은 원래는 양반이 아니었으나 점차 사회적 신분 상승을 통하여 지역 사회의 양반으로 인정되고 향권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말기에는 향반이라는 용어가 토호와 연접하여 사용될 정도로 향반의 토호적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반은 지역 사회, 즉 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중앙의 정치권력이 소수의 벌열 가문에 집중되면서 향반은 중앙의 양반과는 차별화되고 정치적 위상도 변화되어 갔다. 이들은 중앙의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지만 지연이나 혈연 등의 연계망을 통하여 중앙의 정치권력과 유대 관계를 가지면서 지역 사회에서의 권력 즉 향권(鄕權)을 장악하였다. 그래서 조선말기가 되면 흔히 향반은 토호와 연결되어 ‘향반토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향반이라는 용어는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조 있는 여자가 시골 양반, 즉 향반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향촌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에 있는 계층을 향반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알 수 있다(『정조실록』 14년 8월 10일). 또 공자를 모신 사당인 궐리사(闕里祠)의 제의(祭儀)에 그 지역 지배층인 시골 양반, 즉 향반이 대신 지내도록 국가에서 공인하였다는 기사도 있다(『정조실록』 17년 7월 24일).

1820년(순조 20) 전 정언공윤항(孔胤恒)의 상소에서도 향반이 등장한다. 공윤항의 상소에 따르면, 평안도 의주에서 이서(吏胥)와 군교(軍校)의 무리가 군공(軍功)을 빙자하여 의회당(義會堂)을 창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 병사김견신(金見臣)에게 내린 교서(敎書)를 받아서 의회당에 걸어 놓고 시정(市井)의 무뢰배 및 각 읍의 부상(富商)에게 입회비로 예전(禮錢)을 받아 선생안(先生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향인(鄕人)에게는 구안(舊案)이 있고 우리들도 신안(新案)이 있다."하고 또 "향인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에 이서와 군교는 충성을 다하였다."하여, 오래된 양반이나 향반의 후예들은 의주를 떠나려고까지 한다고 하였다(『순조실록』 20년 7월 27일). 평안도에서는 시골 양반, 즉 향반도 기존 지배층으로 인정받아서 새로이 등장하는 이서·군교층들과 부상층들의 성장에 밀려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충청도·경상도·전라도 각 포구의 염분(鹽盆, 소금 찌는 가마솥), 어기(漁基, 고기 잡기 좋은 지역)의 세금은 균역청(均役廳) 소관인데, 모리배들이 각궁(各宮)이나 각사(各司) 및 향반 토호들과 세목(稅目)을 만들어서 징수하는 사례가 보이고 있다(『고종실록』 3년 7월 30일). 이처럼 향반이라는 용어를 토호와 연접하여 쓰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향반이 지역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향권을 장악하고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어염에 대한 사사로운 명목의 세금을 향반 토호가 억지로 징수하는 폐단에 대해서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3년 8월 7일).

이렇게 향반은 각 지역 사회의 지배층이자 지역 사회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양반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경상도 동래와 언양 등에서 특정 가문이 하층민에서 향반으로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사례를 추적한 연구가 있다. 동래 지역에서는 무청(武廳)을 중심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들이 그 지역의 향반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 박정숙, 「조선 후기 정치변동에 따른 향반의 생존 전략: 언양 영산 신씨 가문의 사례」, 『대구사학』88, 2007.
  • 손숙경, 「조선 후기 동래 석대동 하리의 영양 천씨 가계의 사회 지위와 그 이동: 비향반에서 향반으로의 사회 이동과 변경 지역 사회의 역동성」, 『고문서연구』35,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