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리사(闕里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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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자를 모신 사당.

개설

궐리사(闕里祠)는 일반적으로 중국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을 가리킨다. 이곳은 향교와 달리 공자의 후손이 대대로 관리하고 제향을 주관하는 곳이다. 공자에 대한 제사는 애초 이곳에서 시작하였다. 남북조시대 태학에서 공자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고 당대에 전국 향교의 문묘에 공자가 모셔진 이후에도 곡부 궐리사에서의 제사는 이어졌다. 그리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곳 궐리사와 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궐리사는 충청도 노성과 경기도 화성 두 곳에 있었다. 이 둘은 공자의 후손이 제향을 주관하였고,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것이지만 그 성립 배경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숙종 때 세워진 노성 궐리사가 향촌의 사림을 배경으로 한 공자 영당이라면 화성 궐리사는 국왕 정조에 의해서 세워진 영당이었다. 봄·가을로 공자의 진영(眞影)과 성상(聖像)을 모시고, 지방 수령에게 향(香)과 축(祝)을 내려 공씨의 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정조실록』 16년 10월 3일).

변천 및 현황

노성의 옛 이름인 니성에 궐리사가 설립된 것은 1716년(숙종 42)이었다. 애초 이 공자 사당은 궐리사라는 명칭보다 공부자진상사우(孔夫子眞像祠宇), 또는 니산현공자영당(尼山縣孔子影堂)으로 불리워졌다. 이러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궐리사는 신위를 모신 문묘와 달리 영당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제향을 위해 화상을 제작하였다기보다 화상이 있으므로 제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화상은 이경억(李慶億)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매하여 온 것이었다. 1701년(숙종 27)에서 1703년(숙종 29) 사이에 제천의 현령으로 있던 윤렴(尹濂)이 이 화상을 얻어 치소에 보관하다가 해임될 때 진사 이흥주(李興冑)에게 기탁하였다. 이에 이흥주는 횡성현 동편에 중니봉(仲尼峯), 공주천(孔朱川)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알고 그곳 유림들과 함께 화상을 봉안할 사당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사당이 건립되자마자 화재를 만나 결국 사당 건립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이흥주가 소장하였던 영정은 전라도 화순현에 살던 공사중(孔思中) 등의 공자 후손에게 전해져 1716년(숙종 42)에 노성에서 사당 건립을 보게 된다. 현재 노성 궐리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1에 있다.

화성 궐리사는 1792년(정조 16) 정조의 칙명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정조가 궐리사를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에 창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죄인의 자식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집권 초기부터 개혁 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기반을 닦고 왕권을 회복한 후 숙원이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읍이 있던 화산 아래의 천하명당으로 옮겨 장차 능(陵)으로 격상시켜 완전한 복권을 도모하였다. 이후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이 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임을 알자, 1793년(정조 17)에 왕이 옛터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공자가 살던 곳의 이름대로 지명을 궐리로 고쳤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절되었다가 1900년 사당이 중건되었고 이듬해 강당이 세워졌다. 현재 위치는 경기도 오산시 궐1동 147번지에 있다.

형태

노성 궐리사는 공자의 영상을 봉안한 영당으로 기와로 된 정면 3칸, 측면 3칸, 면적 약 1,564㎡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1978년 12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화성 궐리사는 솟을대문에 사고석담을 돌려 지었으며 삼문에는 성묘라는 현판과 하마비가 있다. 원래 사당과 장각(藏閣)을 중심으로 제향하는 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학문을 가르치던 공간이 나란히 있는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집이고 앞쪽에는 개방된 툇간이, 측면에는 방화벽이 있다. 사당의 안쪽 중앙에 후벽을 약간 뒤로 물려 만든 신주를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그곳에 공자의 영정이 있다. 장각은 사방이 1칸인 익공계 맞배지붕 집으로 안에는 공자의 화상과 행적을 그린 중국의 성적도(聖蹟圖)를 본떠 만든 궐리사 성적도와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소로수장 팔작지붕집이다. 대청이 있고 동쪽에만 2칸의 온돌방이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한국의 2대 궐리사로, 조선후기 사당 형식을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후기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결국 노성의 궐리사도 그것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래와 같은 일화는 정조가 서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채제공이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즉각 옮겨 봉안하지 않는 것은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고 말하자, 정조는 노성의 궐리사도 역시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전국 360군데의 군현에 다 공자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어찌 유독 노성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한단 말인가?" 하며 부정적인 뜻을 보였다. 그러고는 교화가 지극하지 못하고 풍속이 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이왕에 만들어진 사당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으나, 앞으로는 감히 옛 성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예조의 관리에게 지시하여 각 도에 공문으로 알리게 하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5년 6월 5일). 하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수원의 궐리사에는 편액을 내리고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정조실록』 16년 10월 3일). 이는 정조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조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화성궐리사지(華城闕里祠誌)』
  • 『노성궐리지(魯城闕里誌)』
  • 高明士, 오분윤 옮김, 『한국교육사 연구』, 대명출판사, 1995.
  • 이욱, 「조선시대 노성 궐리사와 공자 사당」, 『종교연구』4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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