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진(海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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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충청도 해미현에 설치한 육군 진영으로, 호서좌영으로도 불림.

개설

조선후기 해미진은 충청도 진영으로, 주진(主鎭)인 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 간 뒤 군사적 공백을 없애려고 1652년(효종 3)에 설치하였다. 하지만 해미현은 충청도 다른 진영이 있는 고을에 비해 경제력이 매우 뒤처졌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1664년(현종 5)부터 해미현감이 영장을 겸임하게 하되, 무신을 수령으로 임명하여 군병 지휘 등을 효율적으로 하려 하였다.

해미진영 군병은 『여지도서』에 따르면 3,967명이었다. 해미진영이 속읍(屬邑)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담당하였고, 육군이지만 강화도 방어에도 참여하거나 이양선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또한 도둑과 천주교도의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수재(水災)가 심각한 해에는 대민지원(對民支援)에도 나섰다.

해미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51년(효종 2) 영의정김육(金堉)이 호서와 영남 사이의 도적을 효과적으로 체포하기 위해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기고, 청주목사로 하여금 병마절도사를 겸임케 하여 음식이나 물품 따위를 바치는 지공(支供)의 폐단을 줄이자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충청병영은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졌다.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긴 데에는 임진왜란 때 충청병영이 서해안에 치우쳐 있어 왜적이 진격하거나 영남과 호남에 주둔했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선조 때와 인조 때부터 있었던, 충청병영을 내륙인 청주나 충주로 옮기자는 건의가 비로소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충청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 가자, 정부는 병영이 옮겨 가고 난 군사적 공백을 우려하여 1652년 해미진영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해미진영의 설치로, 충청도 진영은 ‘전영 홍주진, 좌영 해미진, 중영 청주진, 우영 공주진, 후영 충주진’의 5진영 체제를 갖추게 된다. 좌영인 해미진영은 한편으로는 병영의 지휘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미현감이 영장을 겸임하여 속읍인 ‘대흥·예산·결성·온양·해미·덕산·아산·당진·면천·평택·신창’ 등지의 군병의 훈련과 점검 등을 주관하였다.

해미진영 군병은 3,967명으로,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27명, 지구관 2명, 기패관 56명, 마병 437명, 보군 3,432명’이었다.

해미진영의 재정 지출은 ‘영장과 군관의 급료, 반찬값, 종이·붓·먹 구입 비용’ 등으로 나뉘는데, 그 재원은 소속 읍이 마련하였다. 영장이 파견된 경우, 영장 일행의 1년간 급료로 84섬을 지급하는 데 비해, 현감이 영장을 겸한 1664년(현종 5)부터는 영장 일행의 급료가 48섬 6말 8되로 줄어들었고, 숙식 비용도 많이 경감되었다.

해미진영은 영장이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고, 1684부터 1687년까지 강화도 별중영이 되어 강화도 방어에 동원되었다. 19세기에는 외국 배의 동태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등,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 압력이나 침략으로부터 충청도 서해를 방어하였다.

1665년(현종 6) 해미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함에 따라 해미진영은 토포영이 되고, 토포군관 30명을 배치하여 도적 체포 등 치안을 담당했는데, 1866~1868년 병인교난에서는 천주교도 54명이 해미진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밖에 수재가 심했던 1810~1859년 해미진영은 군사 조련과 점검 대신 둑을 쌓는 등 대민지원에도 참여하였다.

변천

설립 초기에는 해미진영에 영장이 파견되었으나, 해미진영이 있는 해미현이 충청도 다른 진영의 고을에 비해 경제력이 매우 떨어져 주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1664년부터 현감이 영장을 겸하였다.

해미진영의 소속 읍은 원래 13개였으나, 서산과 태안이 안흥진으로 이속되어 11개로 줄었다. 해미진영은 1665년부터 토포영을 겸하였는데, 천안과 온양 지역의 도둑을 잡기 위해 1703년(숙종 29)부터 1712년까지 온양으로 진영을 옮겼다가 환원되었다(『숙종실록』 29년 4월 2일). 이 기간에는 해미현수령을 무관 대신 음관(蔭官)이나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해미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여지도(輿地圖)』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대동지지(大東地志)』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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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선빈, 「조선후기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충청병영성에서 호서좌영으로-」, 『역사와 담론』5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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