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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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고종과 대신을 압박하여 체결한 조약.

개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고 획책하였다.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하고,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으며, 러일전쟁 승리를 담은 포츠머스조약이 9월에 체결되자 이를 가속화하였다. 일본은 당시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의 체결을 고종 및 주요 대신들에게 강요하였다. 그 결과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는 가속화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5월에는 한국을 러일전쟁의 군사기지화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재편하기 위한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 등을 추진하였다. 이어 8월에는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과 외교에 관한 모든 권한을 장악해 나갔다. 아울러 일본은 러일전쟁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묵인 혹은 승인받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이끌어 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묵인받았으며,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행동에 양해를 받아 냈다. 9월에는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포츠머스조약을 맺으면서 러시아에게도 일본의 한국 침략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러일전쟁의 승리와 그에 따른 열강의 묵인 내지 양해로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를 위하여 11월 추밀원장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무장한 일본군을 궁궐 주위 및 주요 지역에 배치함과 동시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개최하여 한일협약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참석하지 않았으나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은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조약에 찬성하고 말았다. 그 결과 1905년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 즉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실질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내용

외부대신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체결된 한일협상조약은 전문 5조로 구성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外務省)을 통하여 오늘 이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함과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맡아 처리할 수 있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정부에서 상당(相當)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서명하여 조인한다.

일제는 무력까지 동원해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였지만, 외부대신박제순의 날인을 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을사늑약에 공식 명칭마저 써넣지 못하였다. 또한 서명자인 한국외부대신과 일본공사의 전권위임장뿐만 아니라 황제의 비준서도 없어서 국제법적인 절차와 형식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을사늑약은 불법·부당할 뿐 아니라 조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은 이후 1910년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과정에서 합법적인 형태를 띠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변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인 통감의 정치가 시행되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노정을 밟게 되었다.

참고문헌

  • 정해식 편, 『구한말조약휘찬』, 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1964.
  • 최덕수 외, 『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 열린책들,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