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역(豊田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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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일대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풍전역(豊田驛)은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4군 6진을 개척하고, 동북 지방에 역을 신설하면서 역로(驛路)를 재편할 때 신설되었다. 그 뒤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경기강원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의 관할이 되었고, 세조대에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은계도(銀溪道)의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1424년(세종 6) 양주(楊州)와 회양(淮陽) 사이의 일부 역을 합속(合屬)하였는데, 풍전역은 풍천역(豊泉驛)과 전원역(田原驛)이 통합되면서 신설되었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기강원도정역찰방이 관할하는 22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철원 편에 따르면, 풍전역에는 대마(大馬) 3필, 기마(騎馬) 5필, 복마(卜馬) 8필 등 총 16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59명, 역노(驛奴) 202명, 역비(驛婢) 1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驛丞)을 두는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에는 은계도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풍전역은 은계도찰방이 관할하는 17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성종대에는 풍전역을 비롯해 은계역(銀溪驛)·생창역(生昌驛)·직목역(直木驛)·창도역(昌道驛)·신안역(新安驛) 등 강원도의 6개 역이 매우 쇠퇴하고 궁핍하여, 군관이 내왕할 때 양료(糧料) 즉 식량을 군자미두(軍資米豆)로 공급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4년 11월 1일). 풍전역은 이후 조선후기까지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

풍전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철원도호부 관아 동남쪽 4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철원도호부 남쪽 30리, 『관동지(關東誌)』에는 철원도호부 동남쪽 5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를 살펴보면 풍전역은 한양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연천(漣川)에서 영평(永平)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일대이다.

한편, 조선중기의 문신인 김상헌(金尙憲)은 그의 문집인 『청음집(淸陰集)』에 "풍전역은 임진년의 병란(임진왜란) 이후로 관우(館宇)가 없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괴롭게 여겼으므로, 부백(府伯)인 김정경(金正卿)이 새로이 작은 집을 지었다. 집이 다 지어지자마자 내가 그곳에 당도했는데, 오래도록 가물었다가 마침 비가 내렸기에 기뻐서 읊다."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김상헌은 예조 판서로 재임하던 1631년(인조 9) 영흥(永興)에 있는 준원전(濬源殿)을 봉심하러 갔는데, 철원부사김확(金矱)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무너진 풍전역의 숙소를 재건한 것을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정경(正卿)은 김확의 자(字)이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관동지(關東誌)』
  • 『해동지도(海東地圖)』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청음집(淸陰集)』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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