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역(豊山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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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의 도로망인 수성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함경북도 무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풍산역(豊山驛)은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6진(鎭)의 하나인 회령진(會寧鎭)이 설치된 뒤에 신설되었다. 그 뒤 전국의 역로(驛路)가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되었으나, 그 당시 함길도에 둔 3개의 역도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19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세조대에는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 수성도(輸城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1434년(세종 16)에 김종서(金宗瑞)가 여진족을 정벌하고 새로 개척한 6진 지역의 군현과 진(鎭)·보(堡)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역참을 신설했는데, 풍산역은 회령진이 설치된 이후에 신설되었다. 그 뒤 전국적으로 44역도-537속역 체제를 갖추면서 함길도에는 고산도(高山道高山道)·동기도(東歧道東歧道)·시리도(施利道施利道) 등 3개의 역도를 두었는데, 풍산역은 그 역도에 포함되지 않은 역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풍산참(豊山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참’을 ‘역’으로 통일함에 따라 풍산역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회령 편에 따르면, 풍산역에는 중등마(中等馬) 2필, 하등마(下等馬) 4필 등 총 6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188명, 역노(驛奴) 24명, 역비(驛婢) 21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두는 과정에서 수성도에 속한 역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풍산역은 조선후기까지 수성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풍산역은 『여지도서』와 『무산군읍지(茂山郡邑誌)』에 따르면, 회령도호부 관아 북쪽 85리 지점에 있었다. 그에 비해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풍산진(豊山鎭)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풍산보(豐山堡)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풍산진과 풍산보는 1684년(숙종 10)에 혁파되고 무산부(茂山府)로 옮겨졌다. 이를 통해, 풍산역은 회령부에 속해 있다가 무산부 관할로 이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함경북도 무산군에 해당한다. 한편, 조선중기의 문인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집(於于集)』에는 풍산역을 제목으로 한 시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무산군읍지(茂山郡邑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어우집(於于集)』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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