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삼(把蔘)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인삼을 물에 삶아 건조하여 1묶음 단위로 포장한 인삼.

개설

파삼은 생삼을 팽조(烹造), 즉 물에 삶은 후 크기를 맞추어 묶음 단위로 포장한 가공 인삼(人蔘)을 일컬었다. 생삼을 훈증하여 말리는 홍삼(紅蔘)의 제조법과 상당히 유사하여 후대에 홍삼의 전신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중국에 진헌용으로 건삼(乾蔘)을 봉진해 왔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중국 내에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여 건삼 외에 파삼과 같은 가공인삼이 제조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1607년(선조 40) 평안도 지역의 인삼 공납(貢納)을 면제해 주고 인삼을 파는 사상의 출입을 금단하는 조치가 취해졌는데, 이때 사관의 평을 살펴보면 당시 인삼의 대중국 수요가 상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을 바치는 것은 기껏해야 지방의 산물에 불과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마치 장생초(長生草)처럼 귀하게 여겨 공경(公卿)과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항용하는 차(茶)로 삼았다. 인삼을 옮겨다 판매하면 그 이익이 100배나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니, 여러 궁가(宮家)와 권문세가에서도 이를 모방하고 삼상(蔘商)을 불러들여 서로 이익을 나누는가 하면 역관과 결탁하여 중원(中原)에다 판매한다.”(『선조실록』 40년 4월 19일)고 하였다.

이처럼 16세기 말 인삼의 대중국 수요가 증가하는 데에는 파삼의 역할이 컸다. 파삼은 황실에 진헌용으로 들어가는 건삼과 다르게 품질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민간 사대부들이 즐길 수 있는 대중 상품으로 인기를 누렸고, 행상(行商)들에 의하여 거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역관과 경상, 개성상인들이 권력층의 비호 아래 중국인들을 겨냥한 파삼 가공과 판매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친 운송과 유통 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삼을 삶아 건조하고 이를 다시 파(把) 단위의 묶음으로 포장하여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거두었다.

변천

파삼이 중국에까지 크게 유통되자, 크고 작은 인삼이 모두 파삼을 제조하는 데에 동원되어 진헌용 인삼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606년(선조 39) 한때 호조에서 파삼을 일절 금단해야 한다는 사무역 금지령을 내렸지만 대중국 파삼무역은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강개시(中江開市)와 같은 공식적인 무역 통로 외에 조선과 명의 상인들은 의주에서 이산에 이르는 지역까지 밀무역인 잠상(潛商)활동을 확대해 갔다.

16세기 파삼의 제조와 유통은 가공 형태와 제조기법 면에서 유사한 홍삼의 유통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박평식, 『朝鮮前期 交換經濟와 商人硏究』, 지식산업사, 2010.
  • 박평식, 「宣祖朝의 對明 人蔘貿易과 人蔘商人」, 『歷史敎育』 108, 역사교육연구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