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환(統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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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작통을 활용하여 마을에 사는 가호의 총수에 따라 환곡을 분배하는 것.

개설

17세기 후반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묶은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시행하면서 통을 단위로 한 환곡 분급이 시행되었다. 통 단위의 환곡 운영은 공동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납부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8세기 환곡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통환은 환곡을 부담하는 호가 늘어났다는 점에서 균등한 부담으로 나아가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환곡이 부실해지고 환곡의 이자를 재원으로 충당하는 경향 속에서 통환은 재정 부담의 균등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17세기 후반 상평청 환곡의 설치와 함께 환곡의 총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숙종대에는 비축 곡물의 확보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진휼정책이 이전까지는 죽을 지급하던 것에서 곡식을 지급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 변화로 곡식의 소비가 많아지자 환곡 분급 대상은 토지 소유자에서 토지가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 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분급되었던 환곡을 안정적으로 회수하기 위하여 분급 대상자를 명확히 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오가작통의 시행을 계기로 이를 환곡 운영에 활용한 것이 통환이었다.

17세기까지의 환곡 분급은 대체로 호(戶)와 토지를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호를 기준으로 삼는 방식에서는 호적이 환곡 분급의 기준이 되었다. 호를 기준으로 운영하는 호환(戶還)의 방식은 환곡을 받은 자가 사망하거나 도망하였을 때 환곡의 환수가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17세기 후반 환곡이 증가하면서 호환 방식 외에도 통환(統還)의 방식이 추가되었다. 1675년에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이 작성되어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었는데(『숙종실록』 1년 9월 26일), 이를 환곡 분급 단위로 삼은 것이 통환이었다. 통환은 통 단위로 분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곡 분급 장부에는 통의 일을 맡는 통수(統首)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통환은 호를 대상으로 하지만 실무적으로는 개별 호를 묶은 통을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호환의 방식에 비하여 분급과 수납에 따른 공동 책임이 보다 강조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 통환에서의 작통(作統)은 반드시 오가작통의 규례에만 묶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작통의 방법에는 오가작통 이외에 1리(里)를 작통하는 이환(里還), 1면(面) 작통, 10가 작통 등이 있었다.

운영 방법도 통수의 이름으로 분급받는 것에서, 통수가 환곡을 분급받는 통 내 환민(還民)에 대하여 보증을 서는 것으로 변하였다. 통수는 통 안의 주호(主戶)와 협호(挾戶), 남녀노소와 인구수를 조사하여 각 호에 대한 대·중·소의 등급을 결정하여 환호성책(還戶成冊)을 작성한 뒤 면임(面任)에게 보고하였다. 환곡을 분급할 때에는 통 단위로 환곡을 받기 때문에 통수가 앞장을 서고 각 사람은 호적을 지니고 차례로 줄을 서게 하였다. 담당 아전이 부르면 통마다 차례로 관가로 들어가며, 통수가 통민(統民)을 이끌고 환곡 문서에 따라 환곡을 분급받았다.

환곡을 납부할 때에도 통 단위로 납부하였기 때문에, 통민들이 상환해야 할 환곡을 합하여 납부하는 도납(都納)의 방식이 활용되었다. 도납은 촌락 공동체에서 부세 문제에 대한 공동 대처 방식이었다. 환곡 납부도 통을 단위로 일괄 처리되었기 때문에 통수는 환곡을 완납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가난하여 환곡을 갚지 못하는 호가 발생할 경우에는 통 혹은 리(里) 단위 내에서 회의를 거쳐 곡식을 마련하고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 또 환민 중에 혹 도망갈 우려가 있을 때에는 그릇을 담보로 잡기도 하였다. 환곡을 납부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 받지 못한 임금이 있을 경우에는 일을 시킨 사람에게 대신 임금을 받아서 미납한 환곡분을 채워 넣기도 하였다.

18세기에 정부에서 환곡 운영 방법으로 통환을 선호한 것은 환곡을 징수할 때에 족징(族徵)의 폐단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곡을 분급할 때 부유한 사람들은 환곡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갖은 방법으로 받기를 원하여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 환곡을 징수할 때가 되면 도망하는 자가 많아서 징수할 곳이 없어진 환곡은 결국 도망한 사람의 친척에게 징수할 수밖에 없었다. 친척이 많거나 부유한 자라면 견디겠지만 친척이 적거나 가난하다면 도망간 자의 환곡을 대신 납부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들마저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환곡뿐만이 아니라 군포(軍布)의 징수에서도 이런 족징의 문제가 벌어졌다. 『속대전』 규정에는 채무 징수의 범위를 친부자간으로 한정하였지만 실제는 6~8촌으로 그 대상이 크게 확대되어 운영되었다.

통환을 시행하면 통수가 환곡을 받는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하였기 때문에 부유해도 환곡 분급에서 빠지지 못하였고 가난해도 많은 환곡을 받지 못하였다. 이를 통하여 균등한 환곡 분배가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환곡 총액이 급증하자 분급할 환곡은 많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는 환곡의 분배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이때 통환은 환곡을 안전하게 징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통의 가호(家戶)에서 받은 환곡의 수는 비교적 많지 않았고, 흉년이 들었다 하더라도 수납에 어려움이 적었다. 오히려 제대로 징수가 되지 않는 것은 많은 환곡을 분배받은 양반이나 토호·관리가 받은 환곡이었다.

변천

19세기에 들어서는 환곡 총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로 인하여 환곡의 이자를 재원으로 활용하던 각 기관에서는 재정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8세기와는 달리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탕감(蕩減)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환곡의 징수는 한층 강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환곡의 부실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虛留穀)이 증가하였다.

18세기 환곡 운영에서는 통환을 통하여 환곡의 고른 분배를 시도하였지만, 19세기에 환곡이 부실화되는 상황에서는 토호·부호(富戶)들이 면임·통수와 결탁하여 환곡 분급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각 고을 사정에 따라서는 통환 이외에 호환 그리고 토지를 대상으로 분급하는 결환(結還)을 함께 시행하기도 하여, 통환에만 편중되는 것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환곡 운영은 재정 마련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환곡의 질이 하락하고 상환 부담이 증가하였으며 환곡을 원하지 않는 호에게도 강제 분급이 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곡이나 그 징수를 위한 통환은 농민 보호의 의미가 아니라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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